젖과 꿀이 흐르는 땅

자녀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오며 가며 듣다 보면 인종에 대한 말을 가끔 한다. 미국이란 나라가 다 민족이 살아가지만 동양인의 얼굴로 살아가는 것은 그들이 늘 의식해야 하는 과제이다. 내가 미국에 온 이유와는 상관없이 자녀들은 비 주류로 살아가며 현실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는데도 새로운 곳에 가면 영어를 할 줄 아냐는 질문을 어려서부터 들으며 살아야 하니……
나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땅에서 이집트의 노예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세 들을 어찌 인도하는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지만 가나안은 저주받은 함의 자손에서 나온 이름이다. 그러나 영걸인 니므롯이 인간의 힘으로 매우 번성해서 열두 정탐꾼의 말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메뚜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초라할 수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이들과 전쟁을 치러서 뺏어야 했다. 무엇으로 이기는가?
말이 전쟁이지 하나님이 다 하셨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싸움들이었다. 어쩌면 주께서 이미 가나안 땅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지도 모른다. 여호수아는 고별사에서 자신과 가족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며 우상숭배를 경고했다.
바로 이점이다. 이 미국에서 부자가 되고 정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유명인이 되어 한인의 위상을 알릴 수 있다. 그런데 주님 편에 서면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건축지 아니한 성과 심지도 않은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민족은 세상에서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했다. 세계 어떤 오지를 가도 한국인이 꼭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참으로 자랑스럽다.
미국에 오래 살았지만 다른 민족을 품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형제요 자매이기에 가능하다.
이웃 마을에 있는 기도원에 오랜만에 갔다. 그런데 목사님은 한국말로 설교하시고 한국 형제가 영어로 말하면 또 다른 형제가 받아서 다른 언어로 통역했다. 알고 보니 타주에서 기도하러 온 버마 사람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거의 사역자들로 일주일, 21일, 40일간 금식 기도를 하고 있었다.
기도원 목사님의 말씀은 한인들은 요즈음 거의 금식기도하러 오는 이가 드물고 오 년째 버마인들이 오며 인도네시아, 베트남, 멕시칸들이 가끔 찾아 온단다. 불교국인 버마에서 신앙생활은 어렵단다. 망명한 이들은 여러면에서 갈급하고 하나님을 의지했다.
세상에는 여러 종족이 살고 있고 살아가는 방법도 다양하다. 미국에 살면서 경험하는 가장 좋은 점은 다른 민족들을 접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점을 주 안에서 수용하고 인정하는 일이다.
세상은 사는 것이 풍부하고 편리해져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많아졌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경고했던 우상숭배는 어떤가! 지금 전염병으로 인해 세상이 변하고 있다.
김기석 목사님은 인류가 생태계를 파괴한 죗값을 지금 치르고 있다고 하신다.
많은 과학자들이 경고했건만 편리한 삶을 추구하는 인류는 포기하지 않았다.
생태계 파괴의 주범인 선진국들이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 삶의 안전지대를 박차고 믿음의 번지점프를 해야 할 상황일 수도 있다. 모두들 만나면 인사가 건강을 챙기시라고 한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그래도 우리는 죽음이 소망이라는 말을 한 천정은 자매의 말을 곱씹을 기회가 아닌가 한다. 그녀는 말기 암 환자인데 병원의 암 병동에서 암 환자를 전도하고 다닌다. 의사는 그녀를 걸어 다니는 시체라 한다.
46세의 그녀는 육 년째 암을 앓고 있고 죽음이 눈앞에 있다. 부활을 체험한 그녀는 살아도 살고 죽으면 주님을 만나기에 더 좋은 것이다. 건강한 성인도 강단에서 30분 말씀을 전하기 힘든데 그녀는 예쁜 가발까지 쓰고 웃으며 한 시간 이상 간증한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놀랄 뿐이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땅은 부자 나라 미국도 아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도 아니다. 죽음 너머 영원한 삶이 있는 그곳이다. 이즈음 스스로 생명을 끊은 유명인의 소식들을 들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다 이룬 것 같은 사람 들이다. 안타깝다. 일 순간인가? 아니면 오래된 병인가?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말대로 속도가 아닌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푯대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쫓아간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새삼 마음에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