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과 가짜뉴스, 언젠가 한 방에 터질 진실의 목소리

미국영화 ‘롱샷(Long Shot)’은 제목과는 달리 대통령에 관한 영화다. 그것도 미국 첫 여성 대통령 이야기다. 물론 실화는 아니지만 내용은 여러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사실은 결코 실화가 될 수 없는, 미국식 로맨스 영화다. 미모의 국무장관이 대통령에 출마하게 되면서 어려서 베이비시팅을 해줬던 연하 남자를 우연히 만나 대선 캠페인 연설 작가로 쓰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매우 허구적 영화다.

십대에 그녀를 짝사랑했던, 그러나 지금은 찌질한 전직 기자 출신의 남자 주인공은 모든 면에서 여자 대통령감의 남자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둘은 사랑하게 되고 결국 여자는 대통령이 된다. 남자가 “이 여자는 나의 대통령입니다”라고 행복하게 말하는 장면으로 결말을 맺는다.

여기서 남녀 주인공의 공통점은 딱 한가지다. 여성이지만 소신을 갖춰 대대적인 인기를 얻어 대통령이 되는 여자, 그리고 소신 때문에 신문사를 그만 두고 무직이 됐지만 그 소신대로 대통령 선거 연설문을 써주고 인정받아 사랑까지 쟁취한 남자, 그들은 각자의 소신이 있었고 그것으로 함께 승리를 쟁취한다. 그래서일까 현실과 대비돼 더 허탈한 느낌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실을 적시했다는 이유로 언론을 비난한다면 건전한 민주주의가 이뤄질 수 없다.” 한국을 찾은 ‘국경없는기자회’ 사무총장이 한 말이다. 그는 “고위 공직자에 대한 검증은 언론의 의무”라며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실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언론인을 혐오하는 태도는 건전한 민주주의를 방해한다는 말도 했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고위 당국자가 무조건 ‘가짜뉴스’라는 이름을 붙여 비난하는 상황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는 매우 전략적인 선동적 정치가에 대한 행태를 꼬집은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어떻게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호도할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적과의 숱한 투쟁을 통해 몸으로 체득한 방어력이 있기 때문이다. 불리하게 되는 즉시, 상대방을 군중이 싫어하는 적폐, 친일, 가짜뉴스 등의 낙인을 씌워 공격하는 방식이다. 저기에 친일파가 있다고 살짝 흘리면 몽매한 군중이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이고, 자신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터.

한국 대통령도 귀를 닫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니면 누군가 옆에서 대통령의 눈과 귀를 닫고 밖의 실제 상황,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오는 말마다 “우리 경제는 잘 되고 있다” “내가 임명한 장관은 좋은 사람이다” “가짜뉴스 듣지마라”는 말들을 한다. 상식적으로도 의혹 투성이인 장관 후보의 각종 비리 소리가 나오는 것 자체에 화를 냈다니 아예 하나도 듣지도 보지도 않는 모양이다. 내가 믿고 싶고, 내가 좋아하면 끝이기에 괜히 다른 말 들어서 자신의 생각을 굽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실 이미 언론의 90%를 친정권 나팔수로 만들었으니 여론 조작은 쉬운 일이다. 그런데도 옳은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저니온다. 방송과 신문이 아니더라도 SNS와 유튜브 방송, 수많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아직도 이 모든 걸 가짜뉴스라고 일축하는 이들을 보면 신기할 정도다. 정말 가짜뉴스에 속아 정치인들이 줄줄이 삭발하고, 수천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하고, 대학생들이 촛불을 들었다고 할 것인가.

논어도 같은 말을 한다. 뛰어나게 지혜로운 자도 그렇지만, 어리석고 못난 자는 더 변화시킬 수 없다고. 뛰어나게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담력이 부족한 사람이고, 어리석고 못난 자는 자신이 잘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정할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다. 어느 쪽인걸까. 아무리 조목조목 따져 잘못된 점을 일러줘도 결국 자신이 말싸움에서 밀렸다고 생각할 뿐 자신의 생각 자체가 잘못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그래도 희망이 보인 적이 있었다. 전통적인 좌파 성향 신문 한겨레가 장관 의혹 검증 소홀에 대한 기자들의 내부 비판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다. 정부 옹호 일색이던 방송국 KBS와 MBC도 노골적 권력 감싸기 보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낸 적이 있었다.

물론 아직은 잠깐이라는 걸 이해한다. 곪은 곳이 한번에 터져 더러운 고름을 일순간 쏟아내고 새 살로 거듭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지금은 피고름만 조금씩 새나오는 정도다. 아직은 견딜만하다고 밀어부치는 정권 앞에 아파도 말 못하는 상처처럼 진실의 목소리는 잠깐 쪼그라들었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저러다 언젠가 한 방에 터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 <이준열 뉴스코리아 편집국장 |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