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부의 소원, 생에서 못 이룬 공무원들의 선택

한국 정치 이야기는 안쓰려고 하는데도 쉽지 않다. 자고 일어나면 사건이 우수수 터진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부정 부패, 그 내막들이 속속 파헤쳐지니 눈이 안 갈 수 없다. ‘울산시장 선거 공작’ 사건은 검찰 수사가 막 시작됐을 뿐인데 등장인물과 혐의가 심상치 않다. 이는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공직자가 동원된 사건이고, 또 다른 ‘유재수 비호 사건’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실세들과 친밀한 관계인 공직자의 비리를 청와대가 은폐한 사건이다.

대통령은 “우리 정권 권력형 비리는 단 한 건도 없다”고 했는데 이전 정권들 뺨치는 적폐가 드러나고 있으니 당혹스럽다. 검찰은 유재수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를 압수 수색했다. 대통령 임기 반환점을 갓 넘긴 정권의 심장부가 비리 혐의로 연거푸 검찰 압수 수색을 받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번에 자살한 ‘백원우 별동대’ 소속 검찰 수사관은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청와대 파견 근무가 위험하고 겁이 난다”고 했다고 한다. 법을 유린해가며 권력을 휘두르는 현장에서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차라리 모른 척 필부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뭔가 아는 게 있으면 다 불라고 청와대 관련 인사가 수없이 전화로 재촉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압박이 되고 만 것이다. 필부가 되려던 공무원, 그러나 원치 않는 비리의 덫에 걸려 극단적 선택을 한 비극적 사건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이 점점 사소해 보인다’고 쓴 칼럼도 있을 정도다. 사실 숫자적으로 환산해도 그럴 것 같아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 농단 등의 죄목으로 총 32년을 선고 받았다. 수천억 뇌물수수에 내란 혐의까지 받았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17년 징역형에 비해 두 배다. 불특정 다수를 무차별 살인할 경우도 20~25년이 평균 형량인데 그보다 더한 끔찍한 흉악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삼성이 최순실에게 건넨 승마 지원금을 박 전 대통령이 받은 것으로 몰아부쳐 뇌물죄로 국정 농단 탄핵을 적용한 게 ‘폭탄급’이라 치면 현 정권의 그것은 그 여부가 낱낱히 밝혀지면 ‘핵폭탄급’이다. 한 논설위원이 “한 번 하고 마는 정치공작은 없다. 정치공작은 한번 맛보면 그 유혹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공작을 정치로 알고 살아온 운동권 정치인 집단은 더 그렇다. 적폐청산, 역사전쟁, 정치공작, 이 셋은 긴밀해 연결돼 있다”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이러니 한국정치든 그냥 정치든 평범한 소시민으로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아지는 현상을 탓할 수 없다. 온갖 권모술수로 목숨을 구걸하듯 정권 연장만 이뤄지면 되는 수준이 정치의 현주소인 것에 염증을 느껴서인데 어쩌랴.

북한에 대해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필요하다면 사용할 것”이라고 천명하며 김정은을 다시 ‘로켓맨’으로 칭한 트럼프 대통령도 내년 재선이 가장 중요한 정치인일 뿐이다. 북한 지도자와 ‘비핵화 쇼’를 통해 자신의 재선 가도에 꽃을 뿌리고 싶었지만 백두산에서 ‘백마 쇼’만 벌이는 김정은이 도발을 일삼고 있으니 트럼프의 입장이 요동친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김정은 비핵화 의지’가 정체를 드러낸 이상 비핵화 쇼는 곧 파탄날 수 있고 트럼프는 경제, 군사적 제재에 나설 차례다. 외교 치적을 하나 챙겨서 포장하려던 전략이 무너진 이상 다음 수순들은 암울하다. 특히 트럼프 머릿속에 한국 안보도 없어 보여 더 그렇다. 방위비를 더 받아내기 위해 주한미군 주둔이든 철수든 그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있다고 말한 게 바로 트럼프다.

평범한 일개 국민은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의 언행으로 사기와 힘을 받는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공황 탈출 연설이나 처칠 영국 총리의 독일 대항 항전 연설이 그렇다. “바다에서, 해변에서, 들판에서, 언덕에서, 거리에서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울 것”이라는 처칠의 장엄한 연설은 국민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런데 ‘남북 관계 현황에 굉장히 보람을 느낀다’ ‘부동산 문제는 자신 있다’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의 효과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검찰 개혁이 시급하다’는 등, 현실과 괴리된, 마치 딴 나라 사람 같은 말만 하는 한국 지도자에게 우리는 힘을 못 얻는다.

“천하가 망한 데는 필부의 책임도 있다”고 말한 이는 명나라가 망하는 걸 지켜본 유학자 고염무였다. 자신의 죽음으로 국가 부패를 고발하고 망국의 그림자를 막아보려는 한국 공무원들이 나온다. 어찌 그들만의 책임이겠는가. 똑같은 심정으로 애도한다.

<이준열 뉴스코리아 편집국장|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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