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대통령 연설문, 불이 흐릴 때는 흐리다고 말해라

미국과 한국에서 흑인 대통령과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 적이 있다. 또 미국은 할아버지와 손자, 부자 대통령이 나온 적이 있었고 부부 대통령이 나올 뻔 하다 무산되기도 했다. 반면 한국은 부녀 대통령이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 또 하나의 역사가 나올 수도 있다. 동성애자 대통령의 가능성이다. 즉, 대통령 부인이 여성이 아니어서 ‘퍼스트 레이디’ 대신 ‘퍼스트 젠틀맨’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오와 주 민주당 경선에서 한번 선두를 했다고 속단하기는 너무 이르다. 그러나 미 역사상 커밍아웃한 동성애자가 대선에 출만한 것 자체가 처음인데, 미 경선에서 첫 경쟁자이자 그 결과가 전체 경선을 좌우한다는 아이오와에서 선두를 차지했다는 건 엄청난 충격이다.

그것도 그가 누군인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 상황에서다. 이름이 몰타계 성을 가진 피트 부티지지(Buttigieg)여서 발음도 어려워 더 생소한 인물이다. 인디애나 주 사우스벤드 시장을 20대에 거쳤고 이제 30대 최연소 대선 주자로 나온 신예다.

일각에서는 오바마 전 대통령 때와 같은 ‘이변’을 기대하며 ‘부티지지 돌풍’이라고 벌써 흥분한다. 물론 경쟁자들은 애써 아이오와 결과를 무시한다. 사실 동성애자에 어리고 경륜도 부족한 그가 보수성 강한 미국에서 대통령이 될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하버드대와 컨설팅 회사 출신에 8개 국어를 구사하는 ‘엄친아’로 아프카니스탄 참전 경력까지 있어 인기있는 ‘스펙’ 소유자라 돌풍의 여지는 있다. 트럼프 독주의 미 대선이 그나마 흥미있어질 드라마가 되려면 그의 활약이 기대된다는 여론도 없지 않다.

반면 공화당 경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아 경선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 트럼프로서는 민주당의 아이오와 경선 결과를 “완전한 재앙”이라며 되받아치는 기회로 삼는다. “아이오와에서 확실하게 큰 승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트럼프 뿐”이라고 조롱한다.

탄핵도 무산돼 연임이 당연시되는 트럼프의 ‘조롱’ 행태는 유명하다 못해 아예 관심을 끈다. 정신분석가 로빈 스턴 박사는 미국 국민이 트럼프로부터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상황과 심리를 은밀하게 조작해 지배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말한다. 남편이 집안 가스등을 일부러 희미하게 해놓고 어둡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네가 잘못 봤다, 엉뚱한 소리다’며 핀잔주며 현실감을 잃게 하는 연극에서 유래됐다.

그의 이런 능력은 하원에서의 연두 국정 연설에서도 나타났다. 자신을 탄핵소추하는데 앞장선 펠로시 하원의장의 악수를 보란듯이 무시한 것이다. 물론 이날 연설하는 트럼프 뒤에서 펠로시 의장이 트럼프 연설문을 네 차례에 걸쳐 찢어버리는 것으로 복수한 장면도 나왔다. 서로 상대방에 대한 고강도 성토를 할 만 하다. “어떻게 대통령 연설문을 찢는 몰상식한 행동을 하느냐”는 지적에 “현실과 아무 연관 없는 연설로 의회를 리얼리티쇼 배경으로 사용하는 게 역겨워 찢었다”는 주장이 첨예하다.

어쨌든 맘에 들지 않는다고 대통령 연설문을 찢는 걸 보여줄 수 있는 미국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나라가 초토화되고 있는 중국이 이제서야 시진핑 주석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걸 보면 대비된다. 우한 폐렴 확산의 주범은 여론 통제에만 열을 올려 초기 대응에 실패한 시진핑 정권의 독재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죽을 때까지 장기집권이 보장된 시진핑이 집권 내내 시민사회와 언론의 자유를 말살했다는 걸 중국인들은 바이러스 창궐의 재난 상황에서야 직시하게 됐다는 것일까.

유사한 비난을 세계보건기구(WHO)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도 듣는 상황이다. 그는 우한 폐렴에 대한 신속한 대응보다는 연일 중국 두둔에 열을 올렸다. “중국 조치로 우한 폐렴 해외 확산을 막을 기회의 창을 갖게 됐다”느니 “중국에 대한 이동 제한을 하는 나라가 늘어나면 공포가 늘어난다”느니, 질병과 싸우는 국제기구 수장이 아니라 중국 대변인 같은 소리만 늘어놓은 그는 중국 정부 지원에 힘입어 2017년 아프리카 출신 첫 사무총장이 된 인물이다.

한국도 우려되는 건 마찬가지다. 구멍 난 방역망 탓에 2차, 3차 감염자가 늘어나 국민은 불안한데, 정부와 서울 시장은 “메르스 때보다 잘하고 있다”는 근거없는 자화자찬을 한다. 총선이 걱정돼, 역병에서의 국민 보호보다 정치가 먼저인 건 아니길 바란다. 분명 가스등이 흐린 건 흐리다고 인정했으면 한다.

<이준열 뉴스코리아 편집국장 |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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