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사제, 음악가 비발디’

비발디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성직자이자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1678년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지오반니 바디스타 비발디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비발디를 임신했을 때 베네치아에 큰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일곱 달 만에 비발디를 낳았는데, 그 때문에 그는 또래에 비해 몸이 허약했다. 이렇게 칠삭둥이로 태어난 비발디는 15세 때에 삭발을 하고 하급 성직자가 되었는데, 어린 시절 시름시름 앓으면서 간신히 자란 몸으로 정상적인 사람도 견디기 힘든 수도사 생활을 해나가는 것은 그에게 아무래도 무리였다. 다행히 수도원에서는 이러한 점을 감안해 그만은 특별히 집에서 다니면서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그 덕에 소년 비발디는 집에서 아버지에게 바이올린 지도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나중에 그가 바이올린의 대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던 것은 물론,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1703년, 서품을 받아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같은 해 9월 베네치아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 여자 양육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취임한다. 피에타 양육원은 여자 고아들만 모아 보육하는 일종의 고아원으로서 특히 음악교육에 중점을 두었는데, 비발디는 실기 지도는 물론이고 원생들로 구성된 피에타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아 했으며 그들을 위해 여러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1703년에서 1738년까지 35년 동안, 그는 이 고아원의 재능 있는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유럽에서 가장 눈부신 앙상블의 하나로 키웠고, 자신의 진보적인 작품을 발표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음악이 대체로 아름답기는 하나 다소 나약하는 평을 받기도 하는 이유는 주로 여자아이들을 위해 쓴 곡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미사곡, 모테트, 오라토리오등 교회를 위한 종교음악 이외에도 오페라까지 섭렵하며, 허약한 체질이었음에도 초인적으로 창작 활동을 해 나갔다. 그의 속필은 특히 유명해, 전문 사보가들의 사보 속도보다도 더 빨리 풀 스코어를 쓰곤 했다고 한다.
비발디의 외모 특징 중 하나는 붉은 머리카락인데, ‘빨간 머리 앤’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는 것처럼, 비발디도 이탈리아인으로서는 드물게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25세 때 사제 서품을 받고 성직자가 된 후로도 그를 보는 사람들의 눈길은 결코 곱지 않았다. 물론 사제로서의 그의 행실에 문제가 없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그에게 붙여진 ‘붉은 머리 사제’라는 별명도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성직자가 된 후에도 미사를 드리기보다는 바이올린을 더 열심히 연주했다고 한다. 미사 전례를 걸핏하면 빼먹어 동료들이 한참 찾아다니다 성당 으슥한 구석에서 약음기를 끼고 열심히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는 그를 발견하는 일도 비일비재였다고.. 또한 미사를 올리는 도중에도 돌연 영감이 떠오르면 성구 보관실에 숨어 푸가를 작곡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비발디의 해명이 참 재미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허약해 선 채로 미사를 올려야 하는 직무를 끝까지 수행하기 어려워 잠시 쉬기 위해 자리를 떴을 뿐이다”
이처럼 음악을 너무나 사랑했던 비발디는 현을 위한 협주곡만도 400곡이 넘을 정도로 방대한 양을 작곡했다. 그러다 보니 작품마다 특색이 별로 없다는 흠을 남기기도 했지만,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작곡가 비발디를 몹시 존경해 그의 현악 협주곡 몇 곡을 건반 악기용으로 편곡하기까지 했으며, 빈 고전파의 모차르트, 베토벤 등에 의해 확립된 독주 협주곡의 선구자로서 오늘날까지 음악사에 길이 남는 음악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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