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역사를 잊은 민족들에게 미래는 없다. 이웃나라 일본에게 말해주고 싶다. 참 수상한 시절이다. 한일 무역 분쟁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가고 있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보상판결과 관련해 국제 협약을 어기고 기어이 화이트 리스트로 제외시켰다. 우리나라가 반도체 수출 강국으로 이미 일본을 제압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수소 불화등 반도체 부품으로 무역 분쟁을 선포했다. 이에 대응해 일본상품 불매운동 일본여행을 포기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지금은 다시 이순신을 불러올 때이다. 오래된 장롱을 박차고 고전으로 먼지가 쌓인 <난중일기>를 읽을 때이다. 이순신의 지혜와 위용으로 이 난국을 돌파구를 찾아보자. 나의 서제에 서해 문집 오래된 책방 시리즈로 <난중일기> <징비록> <한중록> <북학의>등 한 시대를 관통하며 성찰한 고전 중에 <난중일기>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난중일기>는 1592년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초 1일로 시작된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임진왜란 7년의 일기이자 조선 정치 경제 군사상의 뿐 아니라 인간다운 면모를 우리에게 남겨준 귀중한 자산의 역사서이다. 이순신은 무관으로 삼도 수군통제사이기 전에 부모에 효를 다하고 나라에 충으로 목숨을 바쳤다. 군사와 백성들을 네 몸같이 대하고 목민관의 사표가 된 인간 이 순신은 그뿐 아니라 시인의 감성을 지니기도 했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선가 일성호가 나의 애를 끊나니” 한산도 제승당에서 견내랑을 내다보며 걸려있는 이 순신의 시조 한수, 그의 시적 여린 떨림의 감성이 나타난다. 임진년 2월 23일 일기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비가 몹씨 쏟아져 아래 윗사람 구분 없이 일행은 꽃비를 흠뻑 맞았다.” 삼월 봄을 재촉하는 비를 꽃비라 했다. “달빛이 맑고 밝아 티끌하나 일지안네,”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 가슴이 어지럽다.” 이순신을 군사독재시대에 구국의 영웅으로 정권강화 유지를 위해 영웅으로만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군사를 호령하고 노량해전의 승리한 성웅 이순신 만은 아니다. 구국과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과 함께 아파했다. 어머니에 대한 효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고뇌와 아파 몸져누운 인간의 모습도 담겨있다.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깊은 충절을 지금 우리가 난중일기를 읽어야 할 때인 것 같다.

1593년 6월 12일자 일기 “비가 오락가락 하였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 효의 근본을 깨치게 하는 문장이 서늘했다.
이순신도 사람인지라 자기를 모함하고 장수답지 못하게 행동하는 원균을 가소롭다 란 말이 그의 인격에서 나오는 최고의 표현한다. 1597년에 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에서 대패했다. 1백여 척의 전함이 모두 깨어지고 바다 속에 갈아 앉아 남은 것이 없었다.
이순신이 다시 풀려나서 통제사가 되어 거의 초토화된 수군을 수습하고 한척의 거북선도 없이 전선 13척을 가지고 명랑싸움에 승리했다. 그의 용맹과 전략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준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병선을 수리하고 무기를 관리하며 병사들 잘못을 엄하게 처벌하였다.
이순신은 1591년 전라좌수사가 되었을 때 전쟁을 직감하고 새로운 배를 만드는 일을 착수했다. 판옥선에 쇠로 뚜껑을 만들어 덮으니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것 같아 거북선이 되었다. <태종실록>에 처음 선보인다.
전래 거북선을 다시 개량하여 칠갑선을 만들어 실용화한 것도 이순신이다. 일본 조총을 본떠서 개량하여 정철총통을 만들었다. 그는 전장의 승리만이 아닌 무기개발에도 애쓴 장수다. 부산 앞바다 싸움에 크게 승전하고 한산대첩의 승전과 당산포 옥포등 작은 싸움에도 왜적은 섬멸되었다. <난중일기>중에 가장 중요한 건 날씨이다. 맑음, 비, 바람의 강약, 수군은 날씨와 아주 밀접하여 하루도 날씨를 기록하지 않은 날이 없다.
이순신은 전술에 밝았고 지휘관이나 부하들에 대한 신뢰도 깊었다. 동명인 이순신(방답 첨사) 비롯해 정운, 어영담 김인용, 나대용, 권준, 백홍립, 이언량등 그의 충실한 부하 지휘관들이다. 녹도 만호 정운의 죽음을 “지극히 슬프고 가슴 아팠다.” 정운의 초상을 각별히 치르라는. 조방장 어영담의 죽음에 “이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승전 기쁨에다 함께한 지휘관들 죽음 앞에 슬퍼하는 비통한 인간적 모습을 보였다.

이순신은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관직이 파직되고 서울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한 달 여 만에 풀려나 원균이 칠천량에 패하여 도원수 밑에서 다시 백의종군하였다. 1597년 1월부터 3월까지 일기가 빠져있다. 4월에 겨우 풀려나서나 어머님은 돌아가시다. 여기서 잠깐 이순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한 줄 옮긴다. “설날 왜적을 물리칠 일이 급해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서운함을 보이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역사의 영웅 뒤엔 조선 여인, 어머니가 있어 난중일기가 더 파고든다.
임진왜란 중 23전 23승의 이순신의 왜적과 마지막 싸움은 노량해전이다. 세계사의 3대 해전으로 기록되어있다. 1598년 8월에 풍신수길이 죽으면서 조선에 철병할 것을 명령했다. 그해 11월 18일 노량해전에서 새벽부터 조선 명 연합 함대가 진격하여 왜적을 크게 쳐부수고 선두에 싸움을 지휘하던 이순신은 유탄에 맞아 노량에서 지다.
“방패로 나를 가려라,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마라”고 비장한 유언을 남기고 54세로 전사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조국 수호의 염원이 담긴 그 혼이 지금도 살아 우리 국토를 지키고 우리 가슴에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