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 읽기 ‘마이 마더스 다이어리’(박혜자)

박혜자 작가의 첫 단편 소설집 <마이 마더스 다이어리> 출판기념회 이후 책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이 톡톡 튀어 오르는 세찬 물방울같이 여기저기 서 튕겨와 작은 물길을 이룬다.
김수자 선생님의 <바람지다> 이후 10년 세월이 흘러 <마이 마더스 다이어리>가 달라스의 유월을 달군다. 표지에 어머니와 찍은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옛 기억을 더듬게 한다.
이룰 수 없는 꿈 하나를 품고 아홉 편의 단편이 어머니로부터 분리해 나와 우리로 분리되어 이민자들의 새로운 서사를 펼쳐나간다. 단편들은 다양한 주제를 폭넓게 제시한다. 이민자의 일상에 무심히 넘기기에는 목에 가시 같은 통증들에 대해서 결코 긴장과 회의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단편의 제한을 넘어서 소설의 팩트를 제시해 준다. 이곳에 사는 우리들에게 괜찮냐고 안부를 묻고 있다.
작가 논픽션 <미켈란젤로의 꿈>에서 소설가의 기량을 펼쳐보여 주었다. 첫 단편 소설에서 작가는 다양한 시선으로 끌어내는 문장 기법이 이민자의 시각을 보여주며 미적 가치로 전환하기도 한다.
세월이 덧없이 흐르는 것이라지만 마음을 실으면 아름다운 빗살무늬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아홉 편의 단편 중에 <서머 필드> <안녕 레이디> <마이 마더스 다이어리> <쟌의 노래><슈퍼 세탁소> <언덕 위의 집> 여섯 편을 골라보았다.

<서머필드> 는 아름다운 꿈과 현실의 애수를 함께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 선희는 딸 사라를 데리고 미군과 결혼하여 텍사스에 정착하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남루한 일상과 퇴역 군인의 무기력, 불투명한 미래뿐이다. 그녀는 하루 12시간씩 세탁소에서 캐시어로 일하면서 살아간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총명한 우등생 딸 사라가 대학에 진학하여 떳떳한 코메리칸으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사라는 엄마의 희망을 배반하고 가출을 하여 생사를 알 수가 없다.
남편 빌리의 장례식 날 나타난 사라를 향해 선희는 절규한다. “사라 돌아와, 아메리칸 드림은 다시 꾸면 된다. 사라, 사라, 돌아 와 다오!”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빠르게 바뀌는 극적인 장면처리가 단편의 묘를 살리며 작가의 치밀성을 돋보이게 한다.
<안녕 레이디>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작가답게 로봇이 등장한다. 도넛가게에서 일하는 레이디라 불리는 로봇은 베이킹 전용 로봇이다. 새벽 한시부터 정오까지 도넛을 만드는 인간을 대신할 로봇이다. 미래지향적인 소재가 흥미를 유발시키며, 로봇과 함께 살게 될 미래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제시하는 낯선 소설적 패러다임이 책 읽기의 재미와 인생의 통찰력을 주고 있다.

삶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순간이다. 내가 느끼고 실제 체험하는 삶의 근저가 서사의 근원이 된다. 소설 <마이 마더스 다이어리>는 이민자의 세계를 읽는 눈이 외부가 아닌 등장인물을 통해 말한다. 미국의 이민 1세대와 이민 1.5세 사이에 낀 세대 어머니는 이제 늙고 병들어 해바라기 양로원에 위리 안치된다. 소설은 허구가 아닌 현실이며, 파렴치한 간호사들의 케어 방식은 미국요양원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육체적 장애와 언어의 장애를 동시에 지닌 어머니에게 미국 요양원은 감옥과 같다.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결국 어머니는 한국으로 영구 귀국을 한다. 이 소설은 인간의 근원적인 노년의 문제를 다루며 어머니의 벌목당한 기억을 간간히 삽화처럼 따뜻하게 엮어가는 에피소드가 눈물겹다. 단편의 묘를 살린 이민자만이 쓸 수 있는 수작이다.
<쟌의 노래>는 혼혈아 쟌과 입양아 수우, 이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짧고 어둡고 불투명한 사유들이 둥둥 떠다니는 작품이다. 쟌과 수우의 이민 형태는 타의에 의한 이민이라는데 있다.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방황을 하는 두 주인공을 보며, 이들 역시 우리가 껴안아야 할 동포라는 것을 작가는 주지시킨다. 팩트는 깊은 상처의 아픔인데 문장은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깊이 아리지만 날카롭지 않다.

<슈퍼세탁소> 일단 이 작품은 침울한 스토리를 숨기고 첫 도입부부터 경쾌하고 서정성이 넘치게 시작한다. 미국인들의 생활방식과 현대인들의 삶의 질을 말하는데, 세탁소에서 일하는 희정의 일상은 거의 그들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단편의 분량을 최대한 살려 주인공 희정의 과거와 현재를 압축시킨다. 읽다의 매력에 빠진다. 희정 역시 이태원에서 미군 스펜서를 만나 텍사스로 왔다. 그러나 스펜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카드빚 3만 불의 절반을 떠안고 이혼을 한다. 그녀에게는 꿈꿀 미래가 없다. 꿈속에서나마 그녀를 구원해줄 슈퍼맨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는 137pg가 이 소설의 백미이다.
독자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하는 가장 박혜자 작가다운 글 인 것 같다. 독자도 함께 그 꿈에 젓는다. “누나, 옷 왔어요!” 하는 단 한 줄의 문장으로 현실로 다시 이동시킨다. 늘어지는 문장이 없고 가볍고 탄력적인 마무리가 인상적이다. 주인공이 하는 독백, ‘성공한 한인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서도 지독한 공허감과 쓸쓸함을 보았다’라는 문장은 나처럼 평범한 이민자들을 위로한다.

<언덕위에 집> 남동생을 등장시켜 소설을 끌고 간다. 뉴왁이라는 컨츄리에 더 넓은 집을 사서 이사 온지 보름 만에 들판의 고요를 깨우는 총성을 듣게 된다. 총기 문제가 한 가정의 평화를 깨트리고 급기야 누나는 가방을 들고 가출한다.
과감한 소재선택의 다양성에 팽팽한 긴장이 이어질 것 같으나 오히려 약간 느슨하고 희극적 요소가 독자의 부담을 덜어준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더니 이제 버젓이 동네 한가운데서 사격연습을 하는 컨트리 치킨이 생기는구나, 도대체 우리가 사는 이곳이 21세기 미국인지, 무법천지 서부시대인지 모르겠다. 내가 미쳤지 이런 컨트리로 이사를 오다니.”
누나의 자조 섞인 이 말은 정치적 사회적 의미가 깔려있다. 미국의 총기사고는 언제나 많은 희생과 사회문제를 일으키는데, 총기규제 법안은 통과하기가 요원하다.
단편들의 전체 풍경과 문장은 그림으로 치환해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지적 감각과 존재의 탐구 실체와 허구가 잘 조화되어 공감을 형성하는 수작의 소설이다. 박혜자 작가의 고유한 감성이 일단 재미있고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충분하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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