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훈 ‘그 남자의 연애사’

한국을 방문했을 때 찾은 북악 기슭 성북동 한용운의 생가 심우장 가는 길은 성북동의 극과 극을 이루는 서울의 민낯을 보여준다, 심우장이란 무상대도를 깨치기 위한 집이란 뜻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그러한 것처럼 늘 공부하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다.
북향으로 앉은 집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조선 총독부 청사를 마주하기 싫어서 지었다는 일화를 느끼게 한다. <尋牛裝> 위창 오세창이 쓴 전서체 편액이 걸려있다. 소소한 청빈을 느끼게 한 만해의 옛집에서 무빈한 나의 가난을 위로 받았다. 다시 성북동 아랫길에서 최순우의 옛집을 찾았다, 내셔날 시민 문화유산이란 간판을 걸린 작은 한옥, 혜곡 최순우의 정기가 담긴 집, 이곳 또한 조촐한 청빈이 느껴지는 집이다. 댓잎 어우러진 뒤뜰에 이조백자 달 항아리가 놓인 풍경은 절묘했다. 그 품은 넓고 소슬한 청죽으로 들어차 백자 항아리에 달빛이 실루엣된다.
서재 앞에는 <午受黨> 낮잠 자는 방이란 단원 김홍도의 글씨가 판화 편액으로 걸려있다. 선생의 아호인 <오수노인>이란 호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성북동 이야기를 길게 서두로 쓴 이유는 제 방이 <독서당>이란 현판 없이 제가 그렇게 지칭한다. 근데 요즘은 <오수당>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오랫만에 달콤한 연애소설에 빠지고 싶었다. 언젠가 이 책 저자의 말을 메모해 둔 글을 옮겨본다. <사랑을 뜻하는 스페인 말이’amor’이다. ‘mor’는 죽음, ‘a’는 저항하다이다. 사랑은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다. 이 단어를 알고 나서야 독한 불면과 눈물은 감수하면서까지 사람들이 거듭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런 우리들의 연애사이다.>
구입하고 보니 단편 소설집이었다. 두 편 <판녀>와 <무적이 운다>는 문학사상에서 읽은 작품이다. 그 외 다섯 편을 다 읽고 사랑, 그 달콤한 연애소설의 미혹될 작품이 아니었다. 그냥 가슴이 먹먹하다 내 가슴에 무적이 울었다. 거친 파도가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간 것 같다. 드라마나 연애소설들에 나오는 매끄러운 스토리와 문장이 한곳도 없다. 거친 밑바닥 사람들 사랑도 사랑이라고 말한다.

거문도에서 태어난 작가 한창훈은 지금도 바다와 함께 여수 어디에서 생을 생 날것으로 살아가고 있다.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묶은 책이다. 해풍에 소금끼가 묻은 단단한 구릿빛 몸통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창훈 작가의 독특한 시선으로 한치 타협 없이 바다에 거물을 던져 고기를 잡듯 그렇게 팔팔한 느낌이 독자에게 전해진다. 다 읽고 나니 고기잡이 작은 어선이 파도에 패선이 되어버린 듯 내 마음에 상채기를 낸 아픈 이야기다. 두 편<내 사랑 개시>와 <판녀>만 빼고 여섯 편은 모두 바다가 배경인 소설이다.
1963년생인 한창훈 작가는1992년 단편 <닷>으로 등단하여 한계례 문학상을 받았다. 원래 태생이 어부기질인 그는 문학 외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 요산문학상, 허균문학상을 받았다. 화려한 약력도 큰 문학상도 받지 않았지만 그는 자기만의 삶에서 건져 올린 어부의 기질이 힘찬 문학의 맥락을 이어주고 있다. 거문도에서 바다를 가르며 건져 올린 <내 밥상위의 자산어보> <내 술상위의 자산어보> 두 권의 작품은 또 다른 그만의 매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그 남자의 연애사>는 책 제목으로는 작품이 없다. 신선한 느낌으로 확 가슴을 긋고 지나가는 남도 항구의 무적 같은 단편들로 항구에 닿을 내린다. 8편의 단편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그들에 속한다. 그들은 바닷가 가난한 어부의 삶에서 묻어나는 비릿한 취기가 있다. 그들의 투박한 사랑법과 삶의 방식이 처연하고 애잔해 오히려 희극적이다.
<애생은 이렇게> 단편에서 주인공 애생은 고교를 졸업하고 어린왕자를 읽고 청춘에 섬으로 들어와 섬의 어부 남자를 만나 결혼한다, 잔잔한 섬 살이 이야기에서 파고드는 아릿한 낭만과 현실이 소박하다. 주인공 애생이 남편을 사랑하는 사랑법과 그녀의 남편이 사랑을 앓는 모순의 극적 대비가 애생의 마음을 넉넉하게 내주지만 작가가 얄밉기도 했다. 독자는 서서히 마음을 달래게 한다.
가난한 섬사람들의 애환과 안개 같은 미로의 삶이 연속인 <무적이 운다, 가라> 이 단편애서도 섬의 흥망성세의 파노라마를 한 사람의 죽음으로 짧은 단편에 긴 여운을 남긴다. 이 작품에서는 연애다운 연애를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찌찔한 사랑이야기지만 <로미오와 쥴리엣>만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사랑이란 화두를 쓸쓸함으로 던져놓는다. 인생은 어느 곳에도 사랑이 머물기에, 척박한 우리들의 마음에 위로를 주는 작품이다.
<뭐라 말 못할 사랑>에서는 고달픈 수고와 무료함으로 살아가는 청년의 이야기가 화끈 달아오른 불판같이 뜨겁다. 어느 날 신화 같은 일이 벌어진다. 반인 반어 같이 아름다운 나체의 여자가 파도에 밀려와 죽어가는 여자를 살려낸다, 이런 여자와 참 행복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여자가 사라지는 이야기다. 여자를 찾기 위해 점집에서 떼를 쓰다 소설가를 만나 펼치는 이야기다,

한창훈이란 작가의 입담과 글맛은 한국인의 특유의 리듬감이 파도처럼 굽이치고 세상과 사람, 문학과 작가 자신이 이토록 한 호흡으로 문장을 이어간다는 것에 매혹된다.
좋은 책을 읽으면 삶의 지평이 넓어지듯 바닷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바다처럼 낭만적이지 않음에 쓸쓸함을 느끼고 그들을 보듬어 안고 싶어진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고 애절하지 않은 연애는 없다. 단 한 번의 사랑도 죽음에 저항하는 소리 없는 사랑. 바닷가 사내들의 인생은 삶인 동시에 온통 세상을 향한 절규이다. 사랑, 다시 오지 않을 시간에 짠 소금 같은 사랑이 내 마음을 녹여버렸다. 책을 덮는 순간, 생의 한가운데를 겁없이 걷던 내 청춘 어느 날, 죽음같은 그 사랑이 치자 꽃향기로 코끝에 감지되어 아릿함을 느낀다. 텅 빈 2월의 바다,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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