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파란 바다와 윤이상에 잠기다

인천 공항에 내리자 30년을 살다온 이민자로서 낯설음이 없다. 정겨운 우리말에 금방 동화된다. 고국은 자동차를 몰고 역주행에 폭주까지 하며 달리다 피투성이가 되고 싶었든 그 생의 무거움을 네게 내려놓으라 한다. 소백산 자락 계곡과 제주, 떠난 자들이 돌아온 고향, 파랑 짙은 바다가 온통 가을 햇살로 마음의 작살을 던지게 하는 남쪽 바다를 다녀왔다.
뱃전에 기대어 부서지는 포말을 바라보며 한려수도 제승당에 홀로 앉아 시를 읊는 이순신을 만났다. 독일에서 오페라 ‘심청’을 작곡하고 나의 땅 나의 민족을 그리워하다 죽은 자로 돌아온 윤이상 기념관, 45년을 등지고 살다 고향에 묻힌 박경리의 묘소에 술 한 잔 부으며 참배하다, 전혁림 미술관, 김춘수, 유치환, 나전칠기 소반 장인들… 아! 곳곳에 죽은 자들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었네.

작은 섬들이 바다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 다도해라 불리는 통영, 한려수도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이마에 닿는 솔향기 바닷바람, 동피랑 서피랑, 욕지도, 달아 공원의 낙조는 이미 한 생을 다 이룬 자의 고결한 넋처럼 취기를 느끼게 했다. 사랑도, 장사도 해상은 동백과 후박나무 야생화 군락지로 다도해의 절경을 보여준다.
통영 문화예술은 국가무형문화재인 통영 오광대와 남해안 별신굿으로 전통이 살아있는 곳, 통영국제 음악당과 남망산 조각공원, 가는 곳마다 천혜의 자연이 너절한 여행기 따윈 쓰지 말라며 어리석은 나에게 타이른다. 역사와 예술, 장인들을 품은 통영 맥박이 힘차게 뛰는 환희의 가을에 든다,

통영시 중앙로 27 윤이상 기념관에 들어서자 윤이상 선생의 동상 앞에 고개를 숙인다. 그토록 그리워한 조국 통영에 서거 23년 만에 유해를 옮겨와 고향바다를 바라보며 영원한 휴식에 드셨다.
1968년 그 엄한 군사정권시대에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류 되어 1심에서 종신형 2심에서 15년 감형 3심에 10년 교도소에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과 클라이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과 플루트 오브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을 작곡하고 1968년 독일의 베르린 필 교향악단 지휘자 폰, 카리안 등 많은 유럽 예술가들에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었다.

윤이상 선생은 1917년 기울어가는 조선 선비의 서자로 태어났다.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 상업학교로 입학하여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의 제자인 제자 한 바이올린 주자로부터 2년간 화성악 교육을 받았다.
윤이상은 아버지께 일본에 음악공부를 하러가겠다고 하니 반대하여 결국 일본가는 배 삯만 마련하여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작곡 음악이론 첼로 등 수확하고 돌아온다.
44년엔 항일 활동으로 체포되어 2달간 옥고를 기르기도 했다. 통영여고와 부산대학에서 서양 음악사를 강의했고 50년 1월에 부산사범 국어교사인 이수자와 결혼, 한국작곡가협회에서 가곡집 <고풍의상> <달무리> <그네> <편지> <나그네> 5곡을 출판하였다.
1954년 제 5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하며 상금 10만원과 집을 팔아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유학, 다시 57년 독일 서 베를린 국립음악원에서 유명작곡과에게 배움, 57년부터 그가 작곡한 작품들이 유럽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프란시스 트레비의 지휘로 초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며 유럽 음악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돈이 없어 가족과도 함께 떠나지 못하고 부인만 다시 1961년에 독일에서 합류한다. 다시 1964년 남아있던 자녀들이 독일로 와서 합류한다, 가족과 만나자 다시 1967년 부인과 함께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의 생은 이념으로 처절하게 부서진다. 석방 후 독일로 국적을 바꾸고 작곡에 몰입한다. 재독시절 그는 고향 통영에 천착했다. 랜덤 하우스에서 2005년에 출간된 루이제 린저가 쓴 <상처 입은 용>을 읽는 순간 내 속에서 어떤 힘이 큰 해일을 일으켰다. 윤이상 선생을 독일에서 가까이 봐온 루이제 린저가 쓴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윤이상 작곡가에 깊이 들여다 볼 기회가 없었다.
윤이상 선생은 파도소리와 남도의 뱃노래를 듣고 자라 그의 음악적 원천은 고향 통영과 조국이다. 통영은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절대 미향이자 예향이다. 윤이상 선생의 음악은 일제 식민치하의 겪은 민초의 고통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절망과 좌절이 굵고 낮은 첼로의 낮은 음으로 오선지에 농현(弄玄)되었다.
윤이상 선생은 비극적 다이스포라이다. 분단된 조국의 이념에 묶여 차마 두고 떠나기에는 고향바다가 너무 아름다워 가슴에 늘 그 바다를 품고 살았다. 피투성이의 상처를 안고 낮선 땅에서 상처받은 용의 표효를 견디었다. 동과 서의 냉전시대에 조국 남과 북의 민족이 하나 되는 통일을 염원하면 할수록 조국과 멀어지던 시대, 분단의 시련을 음악으로 이루는 동안 유럽서 이미 그의 명성을 떨쳤다, 그러는 동안 조국에서는 작곡가 윤이상을 차단하고 방치해 버린 묵적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윤이상 선생의 음악세계는 남과 북, 조국통일과 동과 서를 잇는 동 아시아적 이미지 표현인 동시에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음악의 결합이며 더 새로운 서양음악의 출구를 모색한 음악으로 음악사적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기념관에는 영상 슬라이드가 상영되고 그가 연주한 첼로 바이올린 악보등과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 대 공로 훈장> 1992년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공로상> 1995년 독일 바르마르에서 예술가에게 주는 최고훈장 <괴테 상 수상> 하시고 이해 11월 3일 영면하셨다.
기념관 전시를 둘러보면서 고통과 환희를 함께 느끼며 그에게 조국은 음악이었다. 다이스포라로 살아온 나의30년 세월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윤이상 선생이 베를린에서 거주하신 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베를린 하우스, 검소하고 단아한 선생님의 성품이 재현된 공간이다. 통영 전통 나전 칠기의 삼층장, 세월의 퇴락이 켜켜이 쌓인 작은 생활도자기 책상 의자 음반 피아노위에 피리와 대금 어느 것 하나 선생의 간절함이 묻어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곳에 도서기증자 이덕희 선생의 책들이 내 눈길을 끌었다. 이곳에서 이덕희 선생을 만나다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기 저서가 나오며 사인해서 보내주신 분, 내 청춘에 문학에 불을 댕겨 눈을 멀게 한 이덕희 선생의 저서에 가만히 손을 얹는다.

윤이상 선생이 생전에 타셨던 독일차가 묵직하게 전시되어있었다. 한 사람, 그 이름, 윤이상, 음악과 조국, 자유와 절대순수, 조국통일을 위한 윤이상 선생의 한 생애가 전해지며 울컥 뜨거움을 삼키며 나선다. 고국의 11월 빨간 가을 낙엽이 발아래 떨어진다.
“선생님 고국의 가을을 담아오세요” 문우 소설가 그녀의 말이 생각나 그 낙엽을 책갈피에 끼워 넣는다. 루이져 린저의 <상처받은 용> 윤이상 선생의 굴곡진 삶의 비극을 대담형식으로 저술된 그 책을 다시 한 번 기억한다.
윤이상 선생은 옥중에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쓰며 이렇게 말했다. “옥중에 있었지만 마음까지 닫히지 않았다”고.
그리고 때때로 아주 행복했다고 하는 루이져 린저와의 대화로 예술가의 예술혼은 얼마나 위대한가.
통영 기행으로 이번 칼럼을 대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