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의 ‘혼불’

나를 끊임없이 자라게 하는 책, 물리적으로는 갈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이라고 하는 건 한계가 있다. 그러나 책은 한계를 뛰어 넘는다. <혼불> 10권의 책이 그렇게 내게 왔다.
<혼불>은1996년에 한길사에서 초판이 출판되었다. 그 후 한길사와 유족 간의 문제가 되어 책이 절판되어 구입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국에 지인에게 책을 구입할 돈을 보내고 오래 기다렸다. 그 책은 강원도 어느 시골 폐교가 된 초등학교를 헌 책방으로 열은 곳에서 책을 구입해 내게 오기까지는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네 곁에 온지도 10년이 훌쩍 지났다.
한국문학에 장편소설의 위상은 황석영 <장길산> 박경리 <토지> 조정래 <태백산맥> 최명희의 <혼불>로 이 작품들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역사와 문학을 아우르는 거대한 산맥이다. 위의 장편소설들은 제가 3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두 번 이상은 읽은 책들이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며 살아 숨을 쉬게 한 정신의 동력이 된 귀중한 장서들이다.

작가 최명희(1947-1998)는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 중앙일보 신춘문예 ‘쓰러지는 빛’으로 등단, 동아일보 창간 60주년기념 장편소설 공모전에 <혼불> 1부가 당선되어 처음 세상에 나왔다. 2부는 신동아에 7년 2개월 월간지 최장기 연재 후 한길사에서 출간되었다. 최명희는 단재문학상 호암문학상 세종문학상 타계 후 목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51세로 사망, 작가는 지금도 <혼불>로 살아있다. 그녀는 호암예술상 시상식에서 “언어는 정신의 지문입니다. 한 나라와 민족의 정체는 모국어에 담겨있습니다”라고 했다.
숨을 거두기 전 산소 호흡기를 쓰고 한 마지막 말은 “혼불 하나면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으로 잘 살다갑니다”였다.
그녀가 남긴 문학적 향기를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이 더욱 소중히 기억했으면 합니다.

<혼불>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 강점기 1930-1940년대 전라도 남원지방의 쇄락해 가는 매안 이씨 문중을 지키는 종부 3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양반의 기품과 이씨 문중의 땅을 소작하며 살아가는 평민과 거멍굴 천민들의 애환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청암 부인은 혼례를 올리고 신행 오기 전 망부가 돌림병으로 죽는다. 양자 아들 이 기채 부부와 손자 이 강모와 허 효원, 효원은 초야에 신랑에게 소박을 맞는다. 삼대이어 여인의 한을 시적 언어의 섬세함과 여성적 감각을 기반하고 있다.
<혼불>은 작품 내용상 소설의 탈 장르라 할 만큼 전통과 문화예술의 정신을 탁월하게 승화시켰다. 그 시대의 사회상 관혼상제의 풍습과 규방문화 우리 민족정신의 본향이 담긴 소설이다. <혼불>에 대한 나의 감동보다 더 예리한 몇몇 작가, 평론가들의 글을 옮겨 독자들에게 더 깊이 다가가길 바란다.

“정겨운 서정과 예스러움을 지향하는 문장으로 된 혼불은 우리말의 보고로서 주술적인 힘과 기운마저 가지고 있다. 우리 겨레의 풀뿌리 숨결과 삶의 결을 드러내는 풍속사이기도한 이 소설은 소리 내어 읽으면 판소리 가락이다.” -문학평론가 유종오.
“혼불의 가장 큰 매력은 조탁한 언어이다. 혼불의 언어는 마치 생동하듯 우리의 느낌에 다가 서는데, 우리는 주술이 걸리기라도 한 듯이 이 빛나는 언어에 매료 된다.” -문학평론가 정일구.
“이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소설 혼불은 여성적인 넋의 고혹스러움과 섬세한 문체의 마력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러면서도 대하 서사적인 규모를 지닌 일대 거작이며 엄층난 폭 넓은 사회소설이다.” -문학평론가 이동하.
열권에 뒷장에는 여러 문인들의 짧고 강렬한 평론이 나의 견해를 발목 잡게 한다. 이 현란한 찬사를 다 긍정하게 하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한국문학사에 빛나는 <혼불>은 신들림과 각고의 세월인 17년이 작가의 투혼의 결정체이다,

10년 전 5월과 6월은 <혼불>에 매료된 청람 빛 시간이었다. 마지막 10권의 장을 덮으며 미완성작품이라는 것이 그녀의 짧은 생을 마감한 것만큼이나 가슴이 아프게 느껴왔다. 그녀는 <혼불>에 그녀의 혼을 다 쏟아놓고 갔다. 문화의 보고라는 말이 작품 속에 다 담겨있다. 전라도 지방 사투리와 순수 우리말의 어휘력,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세습들을 명료하고 깔끔하게 절묘한 문장들로 이루어져있다.
제 1장에 강모와 효원의 잔치마당에 들어서면 신부의 족두리 묘사, 신랑 다루는 놀이, 신행과 연날리기, 안방의 가구 삼층 화초장, 화각버선장, 반지 고리 하나까지도 섬세한 세공과 공예품의 예술성을 글로 표현되어 옛스러움이 기품 있게 스며있다.
상복에 대한 거친 삼베옷 다섯 종류와 상제들이 예절이 사라져가는 민속적인 가치를 재정립 하듯 풀어쓴 문장의 맥이 이어지면서 시의 숨결처럼 살아있다. 작가가 이 시대를 살다간 사람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조선의 계급 사회가 무너지는 뜨거운 침략의 시대를 나딩굴며 살다간 사람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거멍굴 상놈 집안의 여인인가? 매안이씨 집안의 아씨로 살아 쓴 글인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확실한 자료로 고증된 소설이 나를 사로잡았다.
책을 읽다 나는 촛불처럼 자자든다. 사촌 강모와 강실의 사랑은 이 소설의 병리적 주술인가 보일 수도 감출 수도 없는 그 사랑이 너무 아파서 피를 흘리며 몇 날을 앓았다

<혼불>은 세공되지 않고 탄광에서 갓 캐낸 천연 보석 같은 찬란한 빛들이 10권의 책 장 마다 빛난다. 다 잊혀져간 옛것의 부활이며 뼈저린 한 시대의 역사이자 문화의 보루이다. 또한 애처롭고도 강인한 민족의 혼이 스며있는 소설이다. 그 시대의 전통적 서사가 우리 선조들의 일상생활 의례가 면면히 깃들어있다. 처참한 가난과 일제의 억압, 가혹한 인습의 삶에서 인륜의 대소사를 인간과 우주의 조화에 염두에 두고 풀어낸 조선의 마지막 그들의 생애 궤적들이 가슴을 저민다. 그러함으로, 은밀히 속삭이듯 요동치며 소설이 빛을 발한다.
최명희를 두고 문학평론가 김열규는 “그녀는 중출한 이야기꾼이다, 실제로 이 작가의 이야기는 시치고, 뜨고, 호고, 공그리고 밖고, 누비고, 뀌매기까지 하는 섬세한 여인의 바늘 놀림 그대로 이야기를 꿰어간다”라고 했다. 문체는 남도의 판소리로 이어가도 좋을 문체이다. 혹, 환상적이며 시적 언어의 미감으로 물처럼 흐르기도 한다. 한국문학사에 으뜸으로 손꼽을 작품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다. 문학소녀의 첫 관문에 앓았던 전혜린, 김수영, 아쉬움 남기고 간 이문구, 최명희의 죽음은 내게 오랜 시간 걸러내지 못한 과제였다.

청사초롱 잔치마당, 윳 점, 졸곡, 화전가, 작가의 해박함과 우리민족이 지닌 얼과 혼이 베인 민속적 가치를 이토록 잘 들어낸 작가는 문학사에 찾아보기 어렵다. 많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한 작가의 역량이 빼어난 기치를 발휘한 작품에 안도한다. 꼭두서니 빛, 청람 빛의 우리말에 순정을 오래 간직했다.
<혼불> 미완의 작품이 다시 출간되었다. 삼월 마지막 날에 선조들의 만세소리처럼 우렁우렁 지금도 혼불이 들불처럼 번져 우리들 마음에 조국과 함께 새겨지길,,.
삼월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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