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선을 지날 때는 몸살을 앓는다 – 김미희

시월엔 시집 한권을 들고 호젓한 강가로 떠나보세요,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 어떤 것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들 때, 그 유일한 순간에 나는 시를 읽는다,
그리고 시를 읽는 그 순간들이 점철되어 만들어지는 궤적의 시간은 나에게 최상의 온전한 시간이 되어 준다. 일 년에 13번 혹 14번의 북 칼럼이 나가는데 시집 한권은 빠트리지 않고 올리게 된다.

김미희 시인의 첫 시집 <눈물을 수선하다>가 제 빛바랜 생애에 슬그머니 들어와 나의 눈물까지도 수선해 주었다.
<자오선을 지날 때는 몸살을 앓는다> 두 번째 시집 출판기념회 때 이미 북 리뷰를 했다. 그럼에도 시월엔 시집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고희를 넘긴 나에게 청춘의 시간을 되살려 내기라도 하듯 지난 사월 끝자락에 네 곁에 왔다.
시집 제목에 부쳐 자오선이라는 천체적 개념은 천정과 천저, 북국과 남극을 지나는 것을 자오선이라는데 시제로서의 시인의 상상력에 극대치를 이루는 한 문장이 된다.
시적 분위기는 기형도 시인의 시 <검은 꽃>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떠난 자의 회한과 낮선 곳에 정착한 자의 서늘한 시공과 남과 여의 대립 점과 기묘한 대치에 시인의 심상을 들여다 보기가 여간 만만치 않다. “그저 착시이기만 바라는 어둠이다” 더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구절이다.

시는 독자에게 무엇인가? 조국을 떠나온 후로 이민자의 가슴을 후벼 파며 다가오는 희미한 등불 같은 그리움이 우리들에게는 시가 아닐까? 시는 나에게 첫사랑처럼 다가온다.
시집을 펼쳐들고 오래 나를 사로잡은 시, <연안, 그 후> 사랑 그 후가 아닌 연안 그 후라는 시제가 가슴밑바닥을 친다. 소금 냄새와 소금 꽃으로 연안에서 온 사람의 짠 냄새를 더듬게 한다. 그 짠 냄새는 살아있는 이민자들의 날생의 땀 냄새인 것을 저릿하게 퍼지는 “물과 물의 어간에 소금 꽃이 피는 것을 본다” 위로가 되는 시적 이미지가 강열하다.

김미희 시인에게서 보기 드문 감성적 시 한편, <별이 되는 것들> 이 시에는 때 뭍은 생활의 너절함이 없다. <눈물을 수선하다> 첫 시집에서 보여준 삶의 편린들과 밀접한 사물에 대한 체험과 인식의 시와는 정반대의 높고 고운 정취를 불어오는 시정에 사로잡힌다.
“별을 만나러 가는 길은 여럿이어도 쓸쓸하다” “파란 바람 스친 가슴은 모두 별이 되어서인지 몰라” 이 시구는 가슴 설레게 한다. 이런 시를 만나며 가슴에 멍울이 치유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통해 10월 밤하늘의 별을 읽는다. <혀> 참 신랄한 시다. 어떤 경계를 넘어서 보지 않은 자는 이렇게 시니컬한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바람개비> 유년의 사장되지 않은 바람개비의 꿈, 시가 입안에 감기면서 화들짝 마른 날개를 편다. 가볍지만 시의 근간을 보여주는 시를 몇 번이고 읽고 가슴에 담아 채색했다.
김미희 시인의 시가 언제 이렇게 여물었는지? 내가 바람개비가 되어 화들짝 놀랐다. 바람개비 그 찰라의 포지션을 감지한 예리한 촉을 건드린 시다.

<항해 2>와 <항해 3>는 김미희 시인의 시적 지평을 넓힌 작품이다.
보트피플 월남인들의 삶의 근저를 깊이 통찰하여 보여준 작품이다. “속 깊은 국자 하나로 노를 젓는 그가 있다” 초장과 마지막 장에 “든든한 웃음으로 그는 노를 젓고 있다 세상을 젓고 있다”로 끝나는 우렁찬 삶의 기개를 보여 준다. 우리 다 함께 다이스포라라는 배의 노를 젓는다.
<항해 3>은 휠체어로 세상을 향해 생을 노 젓는 그에게 닿은 시인의 마음, “무감각한 허리 아래 세상은 그저 천 길 낭떠러지 일 뿐” 무심하게 지나지 못한다, 시인 앞을 지나가는 그를 보듬는 그 마음이 닿은 시를 느끼며 독자도 더불어 사는 세상을 함께 꿈꾸게 한다. 그래서 나는 시인이 좋다.

시가 완성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먼 것 같다. 그 길은 하늘의 별에 닿는 것처럼 아득히 멀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도 별은 여전히 손닿을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것과 같다. 그처럼 시 창작의 길도 시인에게 험로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생존의 일터이자 MS 테일러는 시의 산실이다. 번듯하고 화려한 작업실이 아니다.
가끔 그곳을 들려 시인의 생활을 엿보며 시는 공간예술이 아닌 상상과 미지에 대한 갈구에서 오는 것 같다. 갇힌 공간에서 철학적 혹 정서적인 시적 이미지를 불러오는 것도 고통의 작업이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누가 시를 짧아서 쉽게 쓸 수 있다고 하는지? 시인의 현존과 실존이 바로 시를 위한 반걸음의 실족이자 반 걸음의 완성이 아니겠습니까? 좁은 공간에서 옷을 수선하며 생존의 노를 젓기도 하지만 시적 상상력의 궤적을 끊임없이 노 저어 아득한 별에 도달하고자하는 예술의 혼을 키우기도 한다.

김미희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며 달달달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음악처럼 시의 저변에서 들린 듯하다. 간혹 타닥, 하고 추렴을 넣듯 매듭을 짓는 소리, 그녀의 일상이 소 우주처럼 그 안에서 하루 낮 시간을 보내고 설레는 시간은 <저녁나절> 시를 읽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세상 틈새를 죄다 훑느라 쳐진 눈매” “차곡차곡 개켜 담았을 오래된 말들을 부려놓는다”
마지막 시구는 이렇다. “저물녁 밟고 일어서는 소금기 가득한 하루의 붉어짐이여” 온전히 다 내어준 그녀의 여린 맥박이 붉어지도록 다 비운 하루가 애처롭다. 시인은 그래서 시인이다. 그 애처러움이 시가 되니까?

비타민 같은 시 40편에는 독자들이 기대어도 좋은 마음의 샘터가 되어줄 것이다
시를 통해 몸 보다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지 않으며 결코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다. 김 미희 시인의 시적 영역은 누구나 범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무거운 삶의 노동이 시인에겐 바람개비처럼 가벼워짐을 위하여 시인의 그 자리에 시의 힘이 근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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