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와 사대부

2월을 우리말로 하면 시샘 달이다.
1월의 겨울 추위를 시샘하고 다가올 3월의 봄 채비를 시샘하는 절기의 중간에서 맹위를 떨치며 시샘하는 달이다.
그래서 2월은 날 수가 짧은 것인가 자연의 이치는 참 오묘한 것 같다. 시샘 달에 어울리지 않게 2월에 책을 <우리 선비>라는 품격 있는 책을 선정해 보았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다는 것은 저자의 생각과 마음을 읽는 행위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를 읽는 것이다.

<우리 선비>의 저자는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정옥자 교수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관장을 역임하고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조선 후기 문학사상사> <조선 후기지성사> 외도 많은 저서와 국사학계 책임 있는 일 맡는 등, 많은 분야에 역임하셨다.
이 책을 펴낸 현암사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시리즈, 우리나라의 문화, 자연, 환경, 상식, 음식, 놀이, 곤충, 농작물, 규방문화, 등 다양한 우리 것을 담아낸 귀한 자산을 담은 책들이 있다.
현암사는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가는데 사표를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 선비를 지칭한다면 교수, 인문학자, 작가, 정치 원로 글쎄요? 교수들의 논문표절에 정치인들의 선 자리가 위태로운 현상들이 과연 이 시대에 선비가 존재하는가 묻고 싶다.
선비는 오늘날에 왜소한 지식인과 곧잘 비교된다. 특히 대쪽 같은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 않은 강인한 기개, 옳음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깨어있는 정신력, 청빈한 마음가짐으로 특정 지어진 선비 상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전후 지식인들이 보여주었던 체질적 한계와 현실 타협적 처신은 조선 시대 선비와 비교하면 선비 정신의 재조명이 요청된다.

선비를 지칭하는 사(士)와 관료를 지칭하는 대부(大夫)의 합성어인 사대부, 선비가 관료가 되기 위하여 피나는 수련과정을 거치는 수기(修己) 단계는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물론이고 치열한 인격 수양이 병행하여야 한다.
이 시대에 정치 사회 각 분야에 진정한 사대부들의 리드쉽이 아쉬운 현실이다.
특히 선비의 청빈정신과 서릿발 같은 기개, 간간히 유머와 여유로움, 탁월한 자기 제어력과 타인에 대한 배려로 우선하는 그러한 선비들의 삶과 정신은 오늘날 지식인에게 주는 암시적 경종임을 깨닿게 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시대로서 사회정의가 구현되었다고 평가되는 세종대왕 때는 청백리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러기에 세종과 같은 성군이 나올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황희, 맹사성, 유관이다. 세 사람은 우정도 돈독했고 실천과 지향을 보면서 세종대왕의 태평성대를 이루어 냈다. 청빈은 부귀와 영화를 누릴 만한 충분한 권력과 지휘를 가진 이들에게 요구되는 미덕이다.

이조 오백년에 선비의 단아한 내면과 실천을 학행 일치한 이상형 선비를 담아본다.
정암 조광조, 역사는 언제나 보수와 개혁의 진통이 따르는 시대가 있다. 16세기 조선 역사는 훈구파와 사림파로 정치적 대립과정에 개혁파 선비인 조광조의 꿈과 좌절의 선명성을 보여 주었다.
조광조는 기묘년 12월에 사약을 받고 사사 되었다. 시대적 시행착오로 조광조의 죽음이 사금석이 되어 16세기 후반에 후학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등 조선에 성리학이 번성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조선 지성사에 퇴계 이황은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선비이자 나아감과 물러남의 의미를 아는 성숙한 사람이다.
선비로 수기하고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어 치인(治人)하다 을사사화 후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고 영남학파의 존경과 예우를 받는 선비이다.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이다. 이들은 35년의 나이 차이 에도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하며 율곡과 퇴계가 이룩한 학문적 토대위의 성리학을 조선에 토착화시켰다.
율곡은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성장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 율곡은 사대부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관료이자 학자로 대성하여 1584년 49세로 생을 마감한다.

사계 김장생은 전후 혼란기에 예(禮)를 세운 학행지사의 선비다. 16세기 말 7년 왜란과 17세기 초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52세 필생의 역작인 [가례집람]을 완성했다.
이 책의 특징은 조선현실에 적합한 예론으로 정립되어있다. ‘이론은 화평하고 각박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비와 사정은 엄격히 따졌다’고 하듯이 그는 꼿꼿한 선비의 표상이었다.

우암 송시열은 도덕적 카리스마로 문화국가의 방향을 잡은 선비이다. 17세기 중 후반 조선사회는 임진란왜란과 병자호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을 일으켜 세우는 국가적 당위에 직면했다.
나라살림을 절약하고 양반들에게 포호법을 시행하여 양민들의 부과를 줄이고 노비종모법을 시행하여 사노비를 억제와 서얼허통등 그 시대의 파격적 건의로 붕당정치의 반대로 무산 되었다.
우암은 숙종 15년 숙의 장씨가 아들 경종을 낳자 원자 책봉을 반대한 상소를 올려 제주로 유배되었고 사약을 받았다. 사약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소신을 지키며 죽음에 임한 선비의 표상이다.
후세에 조광조의 치(政治), 퇴계 이황의 도(道學), 이이 율곡의 학(學問), 김장생의 예(禮學), 송시열의 의(義理)를 조선 선비의 이상으로 다섯 사람을 오현이라 하였다.

조선 중후기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문체반정을 일으킨 비범한 선각자와 다산 정약용의 실학의 집대성을 이루고 추사 김정희의 시서화로 금석학과 고증학을 개척하고 문자 향과 서권기가 빛나는 선비 그들이 있었다.
단아한 내면의 옛 선비들을 불러와 삶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투영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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