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초맘의 서유견문록 제20장

“이민”이라는 단어에는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모든 무게를 내려놓고 떠난 여행이나 출장길에서 잠시 만난 외국은 새롭고 아름답고 낭만적이지만, 말도 설고 물도 선 타국에서 어찌하든지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민살이”에는 종종 두려움, 외로움, 서러움이라는 감정이 실리기 때문에 무게가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이민살이가 항상 심각하고 무료한 것만은 아닙니다. 낯설고 새로워서 여기 쿵, 저기 쿵 하다보니 우리 각자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들이 생겨나곤 하니까요.
슬초맘의 지인 중에는 미국 방문 목적을 묻는 출입국 검사에서 “Travel”이라고 대답을 한다는 것이 그만 발음이 새서 “Terror” 라고 대답을 해 버린 레전드적 인물이 있습니다. 슬초 이모 역시도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주유를 하겠다고 하필 우범지역으로 들어가 기름을 넣다가 깡패의 협박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눈치없고 진지한 우리의 슬초 이모, 흑인 특유의 악센트를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아주 공손히 “Sorry, I am not good at English. Could you please repeat more slowly?”를 몇 번 시전했더니, 그 깡패가 막 짜증을 내면서 떠났다고 하더군요.
여기 쿵, 저기 쿵… 이렇게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서유견문록]을 써 내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언젠가 나눴던 적이 있는 이야기이지만, 눈물겹도록 민망했던 슬초맘의 미국 적응기 중, 가장 낯 뜨거웠던 기억을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엘에이에서 처음으로 혼자 걸어서 운동을 나갔을 때였습니다. 한 대 밖에 없던 차를 타고 슬초빠가 출근을 해 버리고 난 후, 티브이도 없던 집에서 혼자 먹고 자고 뒹굴거리던 슬초맘이 그날 따라 밖에 나가 산책을 해 보겠다 결심을 했습니다. 문제는 제가 만삭이었다는 것이지요. 운동화를 단단히 메고 집 밖을 나서서 좀 걸어보려는데, 지나가던 차들이 자꾸 와서 옆에 서는군요. 어딘가에 가는 길이라면 태워다 주겠답니다.
만삭의 동양인 아줌마가 차가 없어서 걸어가는 것 같아 보였나 봅니다. 아, 이 친절한 국민들이란. “감사합니다만 산책 겸 운동 중 이예요~”라고 한 마디 해 주고 싶지만, 문제는 영어입니다. 이놈의 영어가 대충 알아는 듣겠는데 입에서 바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래서, 말 대신 나름 운동하는 제스쳐를 취해 주고, 씨익 한 번 넉살좋게 웃어주니, 그 친절한 미쿡인의 얼굴 표정이 미묘하게 바뀝니다. ‘이 여자 머리에 꽃 꽂았구나. 상태가 안 좋구나.’하는 표정이 살짝 지나가더니 다시 휑하고 자기 갈 길을 가더군요. 멀쩡하던 사람이 꽃 꽂은 여자되는 것은 아주 순식간입니다. 그러나 진격의 슬초맘, 굴하지 않고 다시 씩씩하게 걸어갑니다. 자, 다음 난관은 바로 횡단보도.
그런데 분명 아까 저 앞에 있던 사람은 잘만 건넜는데, 왕복 6차선의 도로들이 만나는 교차로에서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보행자를 위한 초록색 등이 들어오지를 않는 겁니다. 걸어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그렇게 10분, 20분, 30분.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살은 서서 기다리는 만삭 아줌마를 지치게 하고, 30분 전 지나가던 쓰레기 수거 차량 운전자는 이번엔 다시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며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는 슬초맘에게 불쌍한 시선을 던집니다. 음성이 자동으로 지원되는 듯 합니다. ‘불쌍하기도 하지, 상태가 안 좋은 임산부네.’ 슬초맘, 결국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신호등은 고장난 것임이 분명해! 옆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러나 이건 또 무슨 일일까요? 이쪽 신호등 녀석도 10분, 20분, 30분이 되도록 반응이 없다니 말이지요. 저 멀리에서 아까 그 쓰레기 수거 차량이 또 지나갑니다만, 슬초맘은 이번에는 가로수 뒤에 숨어 애써 아까 그 여자가 아닌 척을 해 봅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땡볕에서 땀을 뻘뻘 흘린 슬초맘, 드디어 오늘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동네 신호등들이 다 고장난 것임에 틀림없어.’
슬초맘, 이 시점에서 남미 생활에서 배워 온 ‘고속도로 무단 횡단하기’ 개인기를 캘리포니아에서도 시전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까짓거 안 해서 그렇지 하라면 잘할 수 있는 개인기였는데 말이지요. 결국 왕복 6차선의 큰 길들이 교차하는 교차로에서 만삭의 슬초맘은 후다닥 날쌔게도 무단횡단을 감행했습니다. 지나가던 차량의 운전자들은 교차로에 뛰어든 이 머리에 꽃 꽂은 만삭의 동양 아줌마의 모습에 잠시 경악을 하는 듯 하였지만, 솔직히 제가 이렇게 된 것이 제 탓입니까? 사방이 다 고장난 신호등들을 잘 정비해 놓지 않은 자기들 잘못 아닙니까? “그러게 신호등 정비를 잘 해 놓았어야지, 왜 만삭 임산부가 무단횡단을 하게 만드냐고”라고 궁시렁 대며 뒤를 돌아보는데, 그런데…… 그런데……
아까 그 문제의 횡단보도 쪽으로 어떤 사람이 다가가더니 신호등에 달려 있는 무엇인가를 누르고 있네요. 그러자 그 죄다 고장나 있었음이 분명했던 그 신호등들에 초록불이 들.어.오.네.요. 우아하게 길을 건너는 그 행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슬초맘은 그날 밤 혼자 괴로와하며 이불킥을 했더랬습니다.
지난 20여 년간의 이민생활 동안 슬초네 가족은 낯선 이 곳에서 눈물나도록 가난해도 보았고 부러울 것 없이 부유해도 보았으며, 죽도록 아파도 보았고 넉넉히 건강해도 보았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슬초는 건강하고 밝게 자라났고, 빠듯한 살림이지만 녀석이 고맙게도 전액 장학금을 받아 이제 타주로 대학 진학을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슬초빠와 슬초맘은 한국의 노부모님과 함께 하기 위해 한국 방문도 보다 자주 하며, 이제까지보다 더 자유롭고 가볍게 인생의 새로운 장을 써 내려갈 예정입니다.
“허허……. 나는 모르는 일이세……”라고 시치미를 떼며 우아하고 고상한 척 할 수 있는 이민 20년차에 접어든 슬초맘이 오늘 굳이 이 낯뜨거운 ‘슬초맘의 서유견문록 제1장’을 들추어 읽어드리는 이유는, 바로 이제 갓 이민을 와 밤마다 혼자 이불킥을 하고 계시는 이민 초보생 독자님들께 다들 시작은 대충 이러했으니 초장부터 낙담치 말고 용기를 내시라 응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민 생활이 익숙해 보이는 그들도, 단지 그들의 ‘서유견문록’이 조금 더 빨리 발행되었다는 것 외에는 다를 것이 없으니까요!
바로 지금, 각자의 서유견문록 제1장, 제2장을 써 내려가고 계시는 많은 들께 힘찬 응원과 격려를 드리며, 지금까지 <슬초맘의 작은 행복찾기> 에세이를 사랑해 주셨던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슬초네도 앞으로 더 씩씩하게,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감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