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찬스

‘엄마’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딸의 가슴에 항상 잔잔한 물결을 일으킵니다. 특히나 딸이 다시 ‘엄마’가 되어 또 하나의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엄마’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한국적인 문화에서 딸의 인생에 있어 엄마의 역할은 지대한 것 같습니다. 학업, 결혼, 출산, 육아의 많은 부분에서 ‘엄마’는 딸이 기댈 수 있는 벽이자 많은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이니까요.

하지만 슬초맘의 경우는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연년생 4남매 중 셋째로 자라며 형제가 많아 좋기도 했지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엄마의 소소한 관심이었습니다. 매사에 강하고 뭐든 잘하는 차돌같은 녀석들을 더 인정하셨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은 항상 보다 약하고 무른 자식들에게 향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린 시절엔 엄마가 모든 것을 챙겨주고 함께 해 주는 주변의 ‘무남독녀 외동딸’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요.
하지만 워낙에 독립적인 성격이었던 슬초맘은 특목고에 다녔던 고등학교 때부터 집에서 나와 지냈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재정적으로도 독립하여 대학원 졸업과 유학, 그리고 결혼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한 후, 딸에 대해 높아진 기대치만큼이나 심하게 반대하셨던 결혼 사흘 만에 이민 가방을 들고 한국을 떠나왔습니다.
딸을 도와줄래야 도와줄 수도 없을 머나먼 태평양 바다를 건너와, 지난 20여 년 동안 험한 이민 생활이었지만 임신, 육아, 그리고 남편의 투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부모의 손길이나 도움 없이 헤쳐 나왔습니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내가 선택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강철 인간 슬초맘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떳떳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수성가한 이들이 흔히 “너도 나처럼 강하게 살아라!”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슬초맘은 슬초만큼은 자신처럼 강한 딸로 키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딸로서, 그리고 엄마로서의 슬초맘의 삶을 돌아보면 내게도 엄마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순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타지에서의 외로웠던 임신과 출산, 산후조리 기간은 딸을 살뜰히 챙겨주는 지인들의 친정어머니들을 보며 사무치게 부러웠던 기간이었습니다. 슬초가 아파 맡길 곳이 없어 회사의 중요한 미팅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 발을 동동 구를 때에도 주변의 친정어머니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군요. 슬초빠가 투병 중에 사경을 헤맬 때에도 전화기 너머에 있는 친정어머니와 슬초맘과의 사이에는 푸른 태평양 바다의 거리가 놓여있었습니다.
슬초맘에게 ‘엄마’는 마음을 터놓고 기댈 수 있는 따뜻한 언덕이 아닌, ‘어머니’였을 뿐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철인 28호 슬초맘에게도 ‘엄마’가, 그리고 ‘엄마 찬스’가 필요했었던 순간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뭔가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서가 아니라. 내 상황을 뭐든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고, 용납해 주고, 다독거려주는 그런 ‘엄마 찬스’가 말이지요.
힘든 이민 생활 중, 그런 ‘엄마 찬스’가 사무치게 부러울 때마다 마음 먹었더랬습니다. 슬초만큼은 꼭 그 ‘엄마 찬스’를 마음껏 쓸 수 있는 딸로 키우겠다고 말이지요.
바로 어릴 적 그렇게도 부러웠던 ‘무남독녀 외동딸’로 키우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마음과 다릅니다. 일단 엄마가 된 슬초맘도 그렇게 섬세한 사랑이 철철 넘치는 엄마가 되지는 못했으니 말이지요. 툭하면 “니 인생이니 니가 알아서 해결해!”라며 뻥 차내는 로보캅 같은 엄마 밑에서 자란 데다, 타고난 성향도 독립적이고 미국의 독립적인 문화에서 자라난 슬초는 엄마보다 더한 또 하나의 철인 28호로 자라버렸습니다. 어릴 적 내가 그렇게도 갈구했던 ‘엄마 찬스’는 슬초에게 ‘엄마의 오버 간섭’으로 느껴지곤 하니 말이지요.

그런데 엄마의 그 ‘섬세한 사랑’을 ‘한국적 문화의 간섭’이라 밀어내 버리는 딸내미에게 약간 빈정이 상하려는 그 순간 돌아보니, 어릴 적 그렇게도 강인했던 나의 ‘엄마’가 이제 약하디 약한 모습으로 자식들의 섬세한 사랑이 필요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네요. 바야흐로 ‘딸 찬스’가 필요한 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이에는 검푸른 태평양이 가로막혀 있지만, 그간 소중히 모아두었던 ‘엄마 찬스’를 ‘딸 찬스’로 바꾸어 사용하기에 아직 너무 늦지는 않았다는 것이 다행일 뿐입니다.
엄마가 되어 버린 딸이 엄마에게 다시 돌려드리는 사랑은, 그 딸이 이제는 ‘엄마’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기에 이전보다 더 깊고 섬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엄마로부터 받을 수 있는 ‘엄마 찬스’는 없지만, 이렇게 ‘딸 찬스’를 쓸 수 있는 짧은 시간이라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 그 자체가 진정한 ‘엄마 찬스’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남은 이 한 장의 찬스, 소중히 잘 사용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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