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착오의 자유, 그리고 권리

이제 곧 12학년이 되는 슬초는 요즘 대입 원서 준비에 한창입니다. 12학년 한 해 동안에도 눈썹이 휘날리게 바쁘게 보내게 될 예정인 에너자이저 슬초인지라 방학 동안 대입 원서를 얼추 미리 준비해 놓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방학 역시도 이성교제와 직업의 세계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 그녀에게 그 외의 다른 것에 차분히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은 넉넉히 주어지지 않았기에,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요즘 슬초가 부쩍 바빠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지원할 학교들과 학과를 모두 결정한 지라 마음의 부담은 그다지 없는 상황입니다. 붙은 학교들 중에서 학자금 지원 상황을 보아서 결정하면 되니 말이지요.
11학년이 되며 시작된 고민 중의 하나는 대학에서 어떤 전공을 선택해야 할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슬초 본인이 해야 할 고민이었지만, 17년간 학교라는 한계적인 세계만을 경험한 아이에게 대학의 전공을 선택하는 일은 쉬운 일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은 문득 그녀도 슬초맘에게 이렇게 묻기도 하더군요. “엄마! 내 친구들은 다 엄마 아빠가 아이에게 바라는 전공이나 직업이 있어서 어느 대학에 갈 것이냐 문제인데, 왜 우리 집은 그런 게 없어요?
나는 대학이 아니라 전공부터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 집은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관심이 너무 없는 것 아니예요?”라고 말이지요.
이 녀석은 나중에 꼭 자기 같은 딸을 하나 키워보아야 자기 부모의 깊은 속을 헤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육아 신념 덕에 그간 킥복싱, 각종 운동, 음악, 미술, 모델 일에 이르기까지 슬초의 온갖 도전들을 지원하며 몸에 사리를 키워냈던 인고의 세월을 겪어왔는데 말이지요.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지난 17년 반 동안 슬초를 키우며 슬초 자신도 잘 모를 수 있는 그녀 자신만의 강점과 약점들에 대한 가감 없고 치우치지 않는 조언을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그 부분만은 저희가 확실히 아는 부분이었으까 말이지요.
“우리 슬초는 새로운 사람이나 환경을 접하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도전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길 수 있다는 점이 타고난 강점인 것 같아. 그리고 리더십이 뛰어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가꾸어 나가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잘 돌볼 줄 아는 것도 참 좋은 점이고. 센스가 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참 좋은 강점이지. 또한 언제 어느 곳에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신나게 놀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주신 큰 복인 것 같아. 하지만 동시에 시간이나 공간을 꼼꼼히 정리하는 것에 약하고, 지겹지만 꾸준히 반복하며 연습해야 하는 것을 싫어하고, 사람이 관련되지 않은 일은 쉽게 지루해 한다는 것, 본인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영역이나 재미가 없는 영역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것, 노는 것만 극도로 좋아하는 것,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등은 큰 약점이지.”
부모인 저희가 슬초에게 권한 직업의 영역은 책이나 컴퓨터와 씨름해야 하는 일보다는 사람을 만나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슬초 자신이 갖고 태어난 기질과 색깔이 가장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무대이니까 말이지요.
시작은 철학부터였습니다. 그러더니 심리학으로 넘어가더군요. 하지만 방학 동안 대학 과정의 인지 심리학을 공부해 보더니 전공으로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며 예체능으로 넘어가더군요. 악기는 꾸준히 연습을 해야 하니 일찌감치 포기했고, 그림에는 소질이 있어 화실을 3년 다녔지만 하루 8시간이 넘게 캔버스 앞에 앉아 있어도 행복한 화실 친구과 친해지며 저런 열정이 있는 친구들이 전공을 해야지 본인은 아닌 것 같다며 미술은 취미로 하기로 했습니다.
한때 에이전시에 속해서 동양인 모델로 잠시 모델 아르바이트 일을 하기도 했었는데, 하루 종일 혼자 거울 앞에 서서 자기도취에 빠져 포즈를 취할 수 있는 동료 모델들을 보더니 저런 친구들이 이 일을 하는 거지 자신은 아닌 것 같다며 그 영역에서도 열정을 잃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이런저런 탐험을 해 보던 그녀는 이제 드디어 인권 학과와 정치학과, 커뮤니케이션 학과라는 세 학과로 전공을 선택하고 대학 지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기까지 먼 길을 돌아 돌와 왔지만, 그녀에게 어떤 아쉬움도 후회도 남지 않는 것을 보니 잘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슬초맘은 그녀의 탐험이 대학 합격과 함께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직업이라는 영역에서도 자신이 가장 행복하고, 또한 자신의 타고난 색깔이 가장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영역을 찾아나가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것은 당연하니 말이지요. 나에게 맞는 옷을 고르려면 직접 입어보아야 하듯이, 가서 공부를 해 보았는데 또 아니다 싶은 상황이라면 너무 늦기 전에 궤도 수정을 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이 에너자이저 슬초에게는 대학에 가서도 전공을 두 번까지는 바꿀 수 있는 자유, 즉 시행착오를 할 자유를 주기로 했습니다. 아직 어리고 젊은 이 영혼에게 시행착오는 자유이자 권리인 것만 같지만, 문제는 슬초맘이 과연 슬초가 매번 시행착오를 하고 돌아올 때마다 괜찮다며 따뜻하게 등을 두드려주고 격려해 줄 수 있는 부처님 수준의 부모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같아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것도 역시 앞으로 슬초와 함께 시행착오를 겪어 나가며 탐험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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