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중한디

나이 들어 건망증이 늘어가는 슬초 맘, 저지르는 만행들도 갈수록 다양해집니다. 가장 자주 일어나는 일은 바로 마트로 출근하기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회사 출근 준비를 완벽히 한 후, 향긋한 모닝커피 한 잔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운전을 하다 정신을 차려보면 슬초 맘의 회사가 아닌 한 한인 마트 앞 주차장에 도착해 있곤 하더군요. 차를 세우고 나오다 텅 빈 마트 앞 주차장에서 헐..! 하며 놀랐던 적이 도대체 몇 번인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달려 나오던 날에 다시 그 텅 빈 마트 주차장에서 차가운 아침 바람을 맞이할 때면 정신없는 스스로가 미워집니다. 출근 도장을 엄한 한인 마트에서 찍곤 하는 슬초 맘, 그 한인 마트에서 열혈 고객 상이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집니다.

이 정도는 애교입니다. 사실 슬초맘의 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증세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슬초네 가족입니다. 슬초가 어렸을 적 일입니다. 퇴근 후 슬초를 학교에서 픽업하기 위해 부랴부랴 일을 마무리하고 급한 마음으로 퇴근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아이 픽업 시간에 늦을까 조바심이 난 슬초맘은 그날도 최선을 다해 속도를 내고 교통난을 요리조리 피해 드디어 목표 시간 직전에 무사히 도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학교가 아닌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지요. 열심히 달려오기는 했는데 그 와중에 딸을 픽업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깜빡한 슬초맘은, 제시간에 도착해서 신이 난 김에 룰루랄라 저녁 준비까지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학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지요. 슬초에게 이 사건은 엄마가 하나밖에 없는 딸인 자신을 잊어버린 쇼킹한 사건들 중, 첫 번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뭐든지 한 번 시작하면 열심인 슬초맘, 일 자체에 몰두하다 보면 가끔 이렇게 목적의식을 잃고 열심히 뻘짓을 하곤 합니다.
얼마 전에도 슬초 방이 너무 지저분하고 어지럽길래 정리를 좀 해 준다는 것이 일이 점점 커졌습니다.
옷을 몇 벌 개어주려고 시작했는데 옷을 정리하다 보니 옷장에 가득한 겨울옷들이 눈에 밟혀서 결국 겨울옷을 빨아서 정리하고 창고에 있던 여름 옷들을 꺼내 걸어주는 옷장 대정리로 이어졌습니다.
옷장 정리는 이불 빨래로 이어지고, 어지러운 화장대와 책상 정리, 진공청소기 청소에 이어 바닥까지 물걸레로 깨끗히 닦고, 내친김에 향초까지 하나 켜고 나니 온 방이 반짝반짝하고 향긋한 것이 기분이 좋습니다.
깨끗해진 슬초방을 보며 혼자 신이 나 있던 바로 그때, 전화기에서 띵~ 소리가 나며 문자가 하나 들어옵니다. 땡볕에서 엄마를 기다리다 지친 슬초입니다.
아뿔싸! 오늘 슬초가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데려다주기로 했는데, 그만 슬초맘이 슬초방 청소에 몰두하느라 깜빡해 버린 것입니다. 그날 또(!) 만행을 당한 슬초는 집에 돌아온 후, 향긋하고 깨끗해진 자신의 방에 별다른 반응이 없고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뭐 입장을 바꾸어 제가 슬초라고 해도 황당했을 것 같습니다.
그날 아, 정말… 나는 왜 이런 칠칠치 못한 엄마인 게냐… 자책하며 성경을 펼쳤더니, 성경에도 칠칠치 못한 엄마가 한 명 보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니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던 중 하루가 지나서야 12살인 아들 예수를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는 데에는 꼬박 사흘이라는 시간이 걸렸더군요. 분주하고 바쁜 데에는 장사가 없나 봅니다.
이렇게 과정에 열심을 부리다 보면 종종 그 열심에 대한 근본 취지와 목적을 상실하기 쉬운 것 같은데, 특별히 이민 생활에서는 신앙생활과 가족생활에서 이런 상황이 종종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믿는 절대자나 믿음을 ‘위한’ 종교 활동과 프로그램 속에서 과도하게 열심히 분주하느라 막상 그 절대자 앞에 서는 시간과 믿음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자녀를 위해 이민 생활을 선택했다지만 성공적인 이민 생활을 위해 질주하느라 막상 자녀들은 뒷전으로 미뤄지고 자녀들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사라지는 경우들이 그러한 예인 같습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그저 바쁘기만 한 이민생활. 가끔은 계기판이 아닌 GPS를 바라보며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어떤 가치를 이루어 나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요즘 유행어로 소위 <뭣이 중한디?>라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시간인 것이지요. 오늘도 텍사스의 새벽이 열리고 탁 트인 하늘에서 시원한 아침 바람이 얼굴에 부딪힙니다.
오늘도 바쁜 일상에 나 스스로를 던져 넣기 전, 슬초맘도 운전대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렵니다.
‘슬초맘, 넌 뭣이 중한디?’ 라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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