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 캐는 소녀

나는 소녀를 무척이나 사랑했었다.

그녀 또한 나를 좋아했기에 우리는 만나면 즐거웠고 그런 행복은 지구의 종말까지 지속될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서로 사랑한다는 고백 한번 못하고 그저 눈빛으로 마음을 주고 받을 뿐이었다.

소녀는 정신적인 사랑 못지않게 나의 건강까지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나물을 캐는 일은 오직 나를 위함이라고 했다.
어느 화사한 봄날, 난생 처음 그녀를 따라 심신산천으로 나물을 캐러 갔었다. 산골짜기에는 여기저기 봄볕을 받아 헐거워진 땅 위로 솟아 오른 앳된 나물들이 막 태어난 간난아이처럼 신선했고, 늘씬녀를 닮은 고사리들은 각선미를 자랑하듯 즐비하게 서 있었다.

봄바람이 싱숭생숭한 숫처녀의 가슴을 헤집어 놓은 탓이었을까? 소녀는 종달새와 어울려 잘도 재잘거렸다.

“보약이 따로 없단다. 초봄에 나는 어린 풀은 아무 것이나 먹어도 약이 되기에 최고의 명약인 셈이다. 하지만 단오가 지나면 잎들이 억세어지고 독이 올라 먹을 수가 없단다.”

소녀의 입은 지지배배 쉬지않고 나불댔다.

“농약이나 인공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공해가 없는 청정한 곳에서 자란 햇나물에는 비타민, 미네랄, 칼슘, 철, 등 각종 영양소가 듬뿍 들어있어 웰빙식품이라 하겠다. 두릅은 당뇨와 신장병에 특효요, 독특한 향을 지닌 냉이와 씀바귀는 춘공증에 제격이다. 망우초, 즉 근심을 잊게 해주는 풀이라는 뜻을 가진 원추리는 아미노산과 단백질이 많아 나른한 몸에 활기를 불어 넣어 준다. 풍부한 비타민이 들어있는 약초인 쑥, 씹을수록 진한 향과 단맛이 나는 더덕도 입맛을 되찾게 하는 으뜸 먹거리이다. 이런 봄나물을 소처럼 많이 먹어 둔다면 저항력이 생겨 성인병의 예방과 치료까지 가능하다.”

그리고 채취를 하는 동안 신선한 공기를 마심과 동시에 자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심신단련에 더 없이 좋은 것이므로 나물을 캐는 일은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선물이며 봄이 주는 위대한 축복이라 했다.
그날, 한 짐 잔뜩 지고 온 나물을 밤새워 정성껏 손질한 소녀는 다음날 아침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 햇볕에 말렸다. 그러면 영양손실이 적고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내가 미국으로 가족을 만나러 간다고 하자 한 보따리 싸주었다.

그 동안 가끔 식탁 위로 얼굴을 삐죽이 내밀었음에도 까마득히 모르고 지낸 나였다. 두어달 전 아내로부터 ‘당신이 오래 전에 한국에서 갖고 온 나물’이라는 자초지종을 듣고서야 비로소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없어요….”

아내의 말에 심장이 덜컹했다. 소녀와 또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 하다니… 이것으로 그녀와의 추억은 영영 끝이구나. 슬펐다. 두 눈엔 이슬이 맺혔다.
당시 소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나물을 캐기 시작한 것은 7살의 어린나이부터였다고 한다. 그것을 팔아 보리죽을 쑤어 5식구의 생계를 연명했다는 것이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배고픔의 서러움을 풀 뿌리로 달래면서 굴곡진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소녀.

내 나이 7살 때는 어떠했던가? 개울로 산으로 세상 모르고 놀러 다니기만 하지 않았던가. 내 아이들은 또 어떠했던가? 풍부한 장난감에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게임기를 갖고 놀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인형이 들려 있어야 할 그녀의 손에는 호미가 들려 있었고, 한창 재롱을 피워야 할 나이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을 캐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소녀가 갑자기 병으로 입원을 해 버렸으니….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었다. 안타깝게도 현대의학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치병이라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하는 수 없이 고향 청주로 내려가 요양을 하게 되었고, 가끔 병문안차 들리면 답답하다며 밖으로 나가자고 조르곤 했었다
소녀가 앓기 시작한 다음해 봄 어느날. 그녀를 휠체어에 태우고 1시간여를 걸어 명암 약수터 근처의 절로 나들이를 한 적이 있었다. 대웅전 앞에서 연꽃처럼 다소곳이 합장을 한 소녀는, 절 주변에 자란 파릇파릇한 푸성귀들을 가리키며 시름 시름한 목소리로 내년 봄에는 나를 위해 꼭 나물을 캘 것이라고 약속을 했었다.

자연의 품에 안겨 아무런 거리낌없이 퍼질 대로 퍼진 나물처럼 편안했던 소녀. 멋이나 낭만과는 상관없이 내가 지극히도 사랑했던 소녀. 봄은 어김없이 찾아 오고 나물은 지천에 깔려 있는데, 나물 캐는 소녀는 보이질 않는다.

그 소녀를 데려간 세월이 몹시도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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