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

장시간 비행 후 땅을 밟으면 김치찌개라든지 짬뽕 같은 뭔가 칼칼한 음식이 당긴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는 데는 매운 게 최고다.
혼자였다면 주저하지 않고 먹으러 갔을 텐데 어젠 지인이 숙소까지 태워다 주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물론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내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아무거나 잘 먹으니 아무 데나 가자고 말한 건 나였다. ‘아무거나’라는 말에 유독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덕에, 그 더운 날, 그 뜨-거-운 칼국수를 땀 흘리며 먹어야 했다. 솔직히 김치찌개를 먹으러 가자 해도 되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 때문에 신경 쓰는 게 싫었다. 돼지고기 안 넣은 김치찌개를 찾는 것도 일이고, 왜 돼지고기를 못 먹냐고 물으면 내 몸에서 일어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에 관해 설명해야 하니 그 또한 귀찮아서 포기했다.
지인과 식사 약속을 할 때는 상대방에게 장소 결정권을 주는 편이다. 내가 먹고 싶은 건 다른 날 먹으면 되니 배려라고 할 수 있다. 뭘 먹을지 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가족은 외식하러 갈 때마다 뭘 먹을지 결정을 못 해서 곤란을 겪는다.
나가면서 생각해보자며 정하지 않고 나섰다가는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꺾어야 할지 몰라 짜증을 내기도 한다. 자칭 ‘결정 장애’인 딸은 늘 ‘아무거나’라는 메뉴를 선택한다. 그러다 보니 결국 아빠 엄마가 정한 곳에서 먹곤 한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알았다. 아무거나 먹고 싶었던 게 아니라 우리를 배려해서 양보하고 있었다는걸. 너무 일찍 철든 것도, 자기 건 못 챙기고 늘 양보만 하는 것도 엄마 입장은 속상하다. 야무지게 살아야 한다고 타일러도 천성이 쉽게 바뀌진 않는 것 같다.
남편은 좀 다르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에 정해놓고 우리에게 가고 싶은 곳을 정하라고 한다. 고민 끝에 기껏 정하면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싫다고 한다. 결국 자기가 정한 곳으로 갈 거면서 뭐하러 진을 빼는지 모르겠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의견을 제시했다. 외식하러 갈 때 한 번은 남편이 좋아하는 곳에 가고, 그다음엔 딸이 좋아하는 곳으로 돌아가며 가는 건 어떻겠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다. 이젠 식당 정하는 게 좀 빨라질 것 같다.
날이 밝으려면 멀었는데 속이 출출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먹자골목의 불빛은 어젯밤처럼 환했다. 요기할 게 뭐 없을까 싶어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서울 사람들은 날이 덥다고 불평인데, 텍사스 살인 더위에 단련되어 그런가 견딜만했다. 24시간 영업하는 식당이 꽤 많았다. 더 놀라운 건 그 새벽에 고기를 구워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청국장’이라고 써진 간판이 보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들어서자마자 “여기 청국장 하나 주세요”하고 자리에 앉았다. 얼마 전 오래된 사진 파일에서 강릉에 있는 초당 순두부 전화번호를 찾았다. 거기서 고유의 냄새를 뺀 청국장 가루를 팔았는데, 지금도 파는지 알아볼 참이다.
새집에 냄새 밴다고 남편이 청국장을 못 끓이게 하니 가루를 사면 괜찮을 것 같다.
몸이 아프면 왜 엄마가 해주던 추억의 음식이 먹고 싶어지는 걸까. 뜨거운 쌀밥에 신김치와 두부를 넣어 바글바글 끓인 청국장을 비벼 먹으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혼밥’은 혼자 먹는 밥이다. 요즘은 사는 게 바빠서 한집에 사는 가족이어도 한 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게 쉽지 않다. 나부터도 혼자 먹을 때가 많다. 나 먹자고 상을 차리는 것도 귀찮아 남은 반찬 넣고 썩썩 비비거나, 김치 하나에 대충 때우곤 한다. 혼자 먹는 게 별스러운 일은 아닌데 ‘혼밥’하면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든다. 한국에 와서 계속 혼밥 중이다.
식당엔 2인용 테이블이 많았다. 혼자 먹는 사람들이 주로 앉아있었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지금은 즐긴다. 아무 때나 내가 먹고 싶은 걸 맘대로 시켜 먹으면 되니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르겠다. 커피 전문점 창가 자리에서 간단하게 먹으며 싱글 때처럼 노트북을 켜고 일하는 것도 즐겁다. 병원 스케줄이 갑자기 잡혀 하루 만에 표를 구해 서울에 왔다.
늘 볼일만 보고 급하게 돌아갔는데 이번엔 딸이 방학 중이고 운전도 하니 여러모로 여유롭다. 내가 누군지, 왜 사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밀려가던 삶에서 벗어나 혼자 먹고, 생각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봐야겠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혼밥족의 대열에 끼어볼 생각이다. 고기는 1인분 주문이 가능치 않다고 들었다. 한우는 먹고 가야 할 텐데, 그렇다면 나도 가수 비가 썼다던 방법을 써야 하나?
“좀 있다 친구 올 거예요. 일단 2인분 먼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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