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캐럴

FM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주파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맘때면 종일 캐럴만 나오는 채널도 있었다.
미국은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바로 성탄절 분위기로 바뀐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로망이나 설렘은 이미 사라졌지만, 캐럴을 듣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하고 따뜻해진다.
음악은 추억을 여행할 수 있는 통로다. 듣다 보면 그리운 사람이 떠오르기도 하고 추억의 장소로 데려다주기도 하니 말이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고맙기도 하지만, 들추고 싶지 않은 상자가 열릴 땐 두렵기도 하다. 잘못 열리면 열병을 앓기도 하니까. 음악이 어디로 튀어 무엇을 클릭할지는 예측 불가다.

종로와 광화문은 고등학교 때부터 드나들던 곳이다. 내가 살던 서대문에서 걸을 만한 거리였다. 지금은 다리가 아파서 웃돈을 얹어준다 해도 못 걷지만, 그땐 열 정거장쯤은 가뿐히 걸어 다녔다. 이 가게를 지나면 어떤 가게가 나오는지, 몇 분쯤 걸어야 덕수제과에 도착하는지, 약속에 늦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보폭으로 걸어야 하는지 모두 꿰고 있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눈이 내리면 내리는 대로 운치 있던 거리였다.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레코드 가게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 놓았다. 거리에 캐럴이 울려 퍼지면 얼었던 마음이 녹고 좋은 일이 생길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귀가 아프도록 크게 틀어 놓아도 누구 하나 소음 공해라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캐럴을 들으면 공허하고 가난했던 마음이 넉넉하게 채워졌다. 그 시절의 중심에 서 있던 내 친구들도 무심코 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을 들으면 우리가 함께 쏘다녔던 그 거리가 생각날까. 특별한 건 없었지만, 만나서 얼굴 보며 수다 떠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성탄의 추억하면 교회에서의 추억을 빼놓을 수 없다. 성탄절 예배를 준비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헨델의 메시아를 연습했고, 유년부 아이들에게 찬양과 성극을 가르치기도 했다.
어릴 땐 주일학교 반사로부터 선물을 받았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챙겼다. 함께 준비하여 드렸던 예배와 찬양이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주고 나누던 시절의 교우들이 그립다. 답답한 현실을 가로질러 그곳으로 달려가면 만날 수 있을까. 팍팍한 데서 사느라 애썼다고 내 등을 도닥여줄 사람이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더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사 알 것 같다. 난 매일 추억을 먹지 않으면 속이 헛헛하다.

12월이 되니 동네가 참 예쁘다. 밤이 되면 동화 속 마을처럼 반짝거린다. 작년만 해도 크리스마스 전구를 단 집이 많지 않았는데. 올해는 몇 배로 늘어 가로등이 없어도 환하다. 빨강 파랑 초록 은색과 금색 온통 크리스마스 색이다. 처마에 알전구를 줄줄이 늘어뜨린 집, 산타클로스나 눈사람 모형을 세워 전구를 켜 둔 집, 커다란 리스를 대문에 걸어둔 집, 남편 표현에 의하면 시골 스탠드바처럼 장식한 집도 있다. 우리 집은 촛불 모양의 금색 전구로 집 가장자리를 장식했다. 멀리서 보면 작은 성 같다.
매년 크리스마스트리를 사서 장식해 보자고 말만 하다 아이가 다 커버렸다. 그놈의 트리가 얼마나 한다고 세일을 기다리며 궁상을 떨었을까. 함께 트리를 장식하고 그 앞에서 산타의 선물을 풀어보는 추억을 남겨주지 못해 미안하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가던 게이로드 호텔도 발끊은 지 몇 년 되었다. 딸내미가 호텔 아이스쇼보다 아이돌 공연을 더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딸이 합창을 그만두면서 나도 선생님을 그만두었다. 지난 오 년간 우리는 교회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공연조차 가지 않았다. 띰이 같은 공연을 매년 보는 게 좀 식상했다. 올해는 표를 끊었다. 내년이면 대학에 갈 딸에게 크리스마스 공연을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큰 무대에 섰던 꼬마 예은이의 추억을 소환해 선물하고 싶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든든한 빽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도 확인했으면 좋겠다.

거실에 스위치를 켜면 예쁜 불이 반짝이고 캐럴이 나오는 소품을 꺼내 놓았다. 연말이 되면 흉흉해서 신문 보기가 겁난다. 올 크리스마스도 안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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