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설의 끝을 다시 써 보려 해

올여름, 텍사스의 더위보다도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던 책이 있었다. 뒤가 궁금하여 단숨에 읽었고, 책장을 덮었을 때 그 뜨거움은 이내 시원함으로 환원되어 가슴에 스며들었다. 오랜만에 책장을 넘기며 두근거렸고 모처럼 행복했다.
교수님이 주신『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황순원 선생님의 제자 작가이거나 오래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작가를 포함한 9분이 황순원의「소나기」를 패러디하여 형상화한 작품을 모은 책이다. 2015년 황순원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는 소나기」이어쓰기 사업을 진행하였다.
「소나기」의 뒷이야기를 각자의 시각으로 이어 쓴 것이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레오 까락스 감독이나 장은연 감독이 만들었던 영화와 제목만 같을 뿐 아무 상관이 없다.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초시네 증손녀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린 팔과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수숫단 속은 비는 안 새었다. 그저 어둡고 좁은 게 안됐다. 앞에 나 앉은 소년은 그냥 비를 맞아야만 했다. 그런 소년의 어깨에서 김이 올랐다. 소녀가 속삭이듯이, 이리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소년이 등을 돌려댔다. 소녀가 순순히 업혔다. 걷어 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그러안았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루 입혀서 묻어달라구……” – 황순원의 소나기 중에서

「소나기」는 가까이 두고 자주 보는 책 중 하나이다. 읽고 또 읽어도 좋다. 그래서 문학 교실에 공부하러 오는 분들께 「소나기」 필사를 숙제로 내주곤 한다.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따라 쓰다 보면 글쓰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이다.
「소나기」는 서울에서 내려온 윤초시의 증손녀와 서당골에 사는 시골 소년의 순수한 사랑을 담은 단편소설이다.
「소나기」의 문장들은 단문이 주를 이룬 데 비해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 없다. 마치 전개가 조금 느린 영화를 보는 것처럼 서정적인 영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필진 중 편집 책임을 맡은 김종회 교수님은 내게 문학뿐 아니라 강의를 통해 삶의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이다.
서하진, 노희준 교수님께는 소설을 배웠고 박덕규 교수님이 엮은 책에 내 작품을 실어주신 인연으로 뵌 적이 있다.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김형경, 이혜경, 조수경 작가님은 문단에 이미 알려진 분들이어서 존함만으로도 실제로 뵌 듯 반가웠다. 저서를 통해 만났으니 뵌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분들이 이어 쓴 「소나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원작은 소녀의 죽음으로 끝났다.
어떤 작가는 그 소녀가 떠난 시점으로부터 혼자 남겨진 소년이 아픈 시간을 어떻게 감당해 내는지 원작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그려냈다.
회상 시점에서 전개하기도 하고, 소년과 소녀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지어주며 중학생으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작가는 고등학생이 된 소년이 소녀의 무덤에 찾아가 호두 한웅큼을 내려놓으며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소녀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죽은 소녀와 함께 자란 사촌이었다는 설정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대학생이 된 소년의 시점, 공장에 다니는 스물한 살 청년의 시점, 손녀를 둔 할아버지 시점에서 쓰기도 했다.
어떤 작가는 소년을 치매 걸린 아내와 사는 노인으로 설정하고 평생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주머니에 조약돌을 담고 다닌 것으로 그려냈다.
소녀를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으로 설정하는 등 다른 시각에서 그들의 삶을 조명했다. 공통으로 어린 시절의 소녀를 쉽게 지우지는 못하였다.
소녀를 추억하는 물건도 조약돌, 호두, 꽃 등으로 다양했다. 소설을 새롭게 쓰려는 시도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였다면 그 소설을 어떻게 이어 썼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헤어진 스칼렛과 레트를 후속편인『스칼렛』에서 다시 만나게 한 것처럼 이어줄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속편『레트 버틀러의 사람들』처럼 남자 주인공을 부각할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패러디 작품이 모두를 만족케 할 수는 없다. 원작의 감동이 큰 경우 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누군가 공감했다면 성공한 것 아닐까.
새로운 시도는 어렵고 힘들지만,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계단이 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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