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출발선에서

딸이 ‘Pre-Kindergarten’부터 14년간 다녔던 ‘Prestonwood Christan Academy’를 드디어 졸업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졸업식 대신 드라이브 스루로 졸업장만 주는 학교가 많다고 들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딸내미 학교는 졸업생의 직계가족과 학교 관계자가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해주었다. 이메일로 보내준 지정석에 가보니 우리 이름과 꽃과 순서지가 놓여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고려해 다른 가정과 떨어져 앉도록 자리를 배치했으나 많은 사람이 갇힌 공간에 있다는 게 편치만은 않았다.
달라스에 코로나 확진자가 점점 늘고 있다는데, 마스크를 쓴 사람이 없어서 더더욱 그러했다. 혹여 유별나다고 할까 봐 가지고 간 마스크는 꺼내지도 못한 채 두 시간 동안 자리를 지켜야 했다. 졸업장은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단상 위 테이블에 놓아두면 학생이 집어서 교장 선생님 쪽으로 걸어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진 촬영을 한 후 내려가면 된다고 식전에 설명해주었다. 기독교 학교라 졸업식을 엄숙하게 진행하는 게 전통인데, 코로나19의 여파로 프롬과 각종 대회와 행사가 취소되어 집안에 갇혀 지내는 12학년이 안쓰러웠는지 개교 이래 처음으로 맘껏 소리 질러도 좋다는 교장 선생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졸업생의 이름이 호명되어 단상에 올라가면 해당 가족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환호해 주기로 했는데, 어떤 가정은 스피커까지 들고 와서 열렬히 축하하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식구라고 해봐야 남편과 나 둘이어서 소리가 들릴까 걱정했는데, 제니스 박이 호명되는 순간 모든 친구가 큰소리로 환호하며 축하해주었다. 파란 졸업가운과 학사모를 쓴 딸이 단상에 서 있는데 콧날이 시큰했다. 짧은 순간에 지난 세월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서로를 응원하며 환호해 주는 모습이 경건한 졸업식보다 훨씬 더 좋았다. 졸업식을 한 지 3주가 지났는데, 코로나 확진자 소식이 들리지 않는 걸 보니 하늘이 도우신 모양이다.
한국어를 쓰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가 미국학교에 적응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들은 빨라서 6개월이면 적응하니 걱정할 거 없다고 주위에선 쉽게들 말하지만, 말이 6개월이지 아이들에게 그 시간은 어둡고 답답한 터널이었을 것이다. 혼자서 적응하며 겪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언어와 문화, 인종과 음식이 다른 환경에서 단련한 14년 세월은 우리가 걱정했던 모든 것의 간격을 좁혀주었고 아이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젠 어디에서도 견딜 수 있는 면역이 생겼으리라 생각한다.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낸 딸이 새삼 고맙고 대견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는데, 딸의 심정은 어땠을까? 문화 차이겠지만, 우리 세대는 졸업식 날 많이 울었는데, 미국학교는 함께 웃는 축제 분위기였다. 졸업만 하면 모든 게 자유롭고 원했던 일이 척척 이뤄지는 줄 알았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걸 그땐 몰랐다. 부모님이 책임져 주던 삶에서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삶으로 갈아탔을 때의 무게가 얼마나 버겁고 무겁던지 참으로 아찔하였다. 주민등록증만 받으면 어른이 되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 딸은 나와 달리 지혜롭고 현실적이다. 목표가 뚜렷하고 자율적이고 자기 일에 책임질 줄 안다. 다행이다.
우리 엄마는 졸업한 나를 세상에 내놓으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금의 나처럼 미덥고 든든했을까. 아니면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내 딸보다 야무지지 못했던 것 같다. 엄마를 생각하면 모든 게 미안하고 죄송하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학업, 진로, 직장, 결혼 모두 야무지게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방법이 없다. 뭔가 안 풀릴 때마다 ‘처음이라서’라고 변명했다. 그래서 실수하고, 실패한 거라고. 남은 생은 잘할 수 있을까? 내가 태어날 때 나만 울고 다른 사람은 웃었지만, 떠날 땐 웃고 싶다. 모두가 울어주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후회의 눈물을 흘리진 않았으면 좋겠다.
9월이면 딸내미는 우리 품을 떠나 대학으로 진학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자신이 선택한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난 3개월 동안 ‘코로나19’로부터 강하게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열악함 속에서도 온라인으로 공부하고, 대회에 나가 우승하고, 졸업까지 하였으니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졸업 단체 사진을 찍은 적이 없는데 단체 사진을 신청하라는 샘플이 왔다. 개인 사진을 모아 합성한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다 살게 마련이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새 출발은 대학 캠퍼스에서 할 수 있길 바란다. 202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모든 졸업생에게 축하와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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