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

|박인애의 행복을 나누는 수다|

어느덧 새집으로 이사 온 지도 2년이 지났다. 우리가 처음 이사 올 때만 해도 공사 중이거나 듬성듬성 팻말이 꽂힌 빈 땅이 많았는데, 지금은 꽉 들어차서 제법 동네다운 모양새를 갖추었다. 워낙 집안 퉁수라 동네 주민이라곤 옆집 사람밖에 모르지만, 기적 소리 간간이 들리는 우리 동네가 마음에 든다. 동네로 들어오는 진입로엔 3층짜리 타운 홈이 좌우로 호위병처럼 줄지어 있고 안쪽으로 주택이 있어서 운전하고 들어오다 보면 다른 나라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노을이 질 무렵 경치는 더 아름답다. 인근 고등학교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밴드 소리는 추억을 클릭해 주기도 하고, 인기척만 들리면 죽어라 짖어대는 뒷집 강아지 소리도 살아 있다는 것을 깨워주는 알람 소리 같아 정겹다.
동네의 나이는 집 앞에 서 있는 정원수를 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달라스라 해도 오래전에 형성된 동네는 아름드리나무가 많아 보이고, 새 동네는 묘목이어서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진 초라하고 볼품이 없다. 우리 집 나무도 각재와 철사로 지지대를 받쳐줘야 간신히 버티고 서 있을 만큼 가늘고 연약했다. 비바람이라도 몰아치는 날이면 어찌나 휘청거리는지 내 허리가 다 시큰거렸다. 연분홍색 꽃이 피는 나무라 해서 기대를 했는데, 살던 곳을 떠나 낯선 땅에 뿌리내리는 게 나처럼 힘들었는지 시큰둥하게 연두색 잎만 내밀었다.
올해는 제법 살이 오르고 키도 훌쩍 자라 흐뭇했는데, 나갔다 돌아와 보니 키가 반으로 줄어 있었다. 남편 솜씨였다. 출근하려다 잔디에 잡초 하나만 보여도 뽑고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니 겨우내 산발이 되어버린 가지를 그냥 두었을 리가 없다. 뚝 잘린 가지 끝에 드러난 속살이 상처 같아 속이 상했다. 왜 아직 자라지도 않은 나무를 잘랐냐고 퉁퉁거렸더니 가지를 잘 쳐줘야 나중에 예쁘게 자란다고 했다. 우리보다 몇 달 뒤에 이사 온 옆집 나무도 같은 종인데 다듬지 않아 지저분하긴 해도 키가 훤칠한 게 내 눈엔 더 좋아 보였다. 그 집 나무는 이미 연둣빛 새순이 돋았는데 우리 나무는 죽은 듯 잠만 자니 ‘다정이 병’이 아니라 ’부지런‘이 병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작년 12월부터 병원 갈 때를 제외하곤 땅 밟고 걷을 일이 없었다. 척추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 통증은 줄였으나, 눌린 신경 때문에 마비된 다리가 편치 않으니 걸을 수도 없었다. 아픈 것보다도 절뚝거리는 게 싫었다. 통증이 없는 동안 교정을 받고 있다. 조금이라도 뼈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신경의 숨통을 열어준다면 운전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이다. 그간 한약을 달여 갖다 주신 분도 있었고, 뼈에 좋은 영양제, 반찬을 해 주신 정성과 사랑 덕에 몸이 많이 좋아졌다.
이번 주 들어서면서부터 다리 저림 증상이 줄고 힘이 생기는 것 같아 봄볕이 완연한 문밖으로 나갔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두 팔을 벌려 균형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걸음 발을 떼었다. 내 어머니가 보았다면 두 손을 벌리고 잘했다고 칭찬하셨을 것이다. 내가 세상에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처럼 말이다. 바쁘게 종종걸음치며 살 땐 잊고 살았던 어머니가 앓아누우니 못 견디게 그리웠다. 자식이란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 못난 불효가 죄송할 뿐이었다.
이제 하이힐은 신을 수 없게 되었다. 키가 작아 늘 높은 신발을 신고 살아 그런지 낮은 신발을 신으면 뒤로 자빠지는 것 같아 불편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운동화도 신어 보니 나름 편안하다. 누가 본다고 그렇게 뒤뚱거리며 허리가 휘도록 휘청거렸을까. 돌아보니 다 부질없는 일이다.
밤새 천둥소리, 빗소리가 요란하더니 죽은 줄 알았던 나무에 새순이 빽빽하게 올라왔다. 얼마나 반갑던지 기를 쓰고 다가가 쓰다듬어 주었다. “살아 있었구나. 잘 왔어. 여기까지 걸음마 해 나오느라 힘들었지. 잘했어. 정말 장하다.”
마른 잔디를 뚫고 올라온 민들레와 시멘트 위로 살금살금 배를 깔고 내려온 잡초들이 눈인사를 건넸다. 봄비가 깨운 소중한 생명이 그렇게 아장거리며 봄 길 위에서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 나무가 꽃을 피울 때쯤 나도 걸음마를 졸업할 수 있을까?
흐린 날 보는 색은 희망처럼 선명하다. 세상이 온통 초록초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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