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서 한 결혼

“너 없으면 못 살 것 같아서 결혼했는데 이젠 너 때문에 못 살겠다.” 결혼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만남과 그 이후의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그런데 예로부터 농담 반 진담 반. 백퍼센트 농담도 백퍼센트 진담도 없다고 했던가. 어쩌면 자신이 꿈 꿨던 모습과 사뭇 다른 현실에 가벼운 넋두리를 던져 보는 것이리라. 그런데 자신이 실제로 완전히 속아서 결혼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한 마디로 이 결혼은 처음부터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면 문제가 달라진다.

우리는 보통 부부 사이의 혼인 관계를 정리하고 마무리하려고 할 때 이혼을 생각한다. 서로 원해서 결혼했고, 이제는 더 이상 함께 살기 힘들다고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애초에 완전히 속아서 결혼을 한 경우라면 간혹 이혼 소송 보다는 혼인 취소 소송을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경우가 있다.
이혼 소송은 그간 있었던 혼인 관계를 끝내는 것이지만, 혼인 취소 소송은 결혼이 성립하는 시점에 애초에 문제가 있었으니 그 혼인 관계 자체를 없던 것으로 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같은 동네에 사는 동갑내기인 김 모씨와 이 모씨는 몇 달 전 어느 사교클럽에서 우연히 만나서 사귀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당시 김 모씨는 미국 시민권자였으며, 이 모씨는 미국에 마땅한 체류 신분이 없던 사람이었다. 이 모씨의 미국내 체류 신분을 걱정한 김 모씨는 결혼 후 바로 이민국에 이 모씨의 영주권 신청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김 모씨는 주변의 최 모씨로부터 이상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이 모씨가 숨기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으며 아직도 몰래 만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영주권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김 모씨와 결혼했으며, 영주권만 받으면 이 모씨는 바로 김 모씨와의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수소문 끝에 대부분의 사실 관계를 확인하였고, 김 모씨는 밀려오는 배신감에 바로 집을 나와 버렸다. 이 모씨가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텍스트 메세지를 보내도 답을 안 했다. 급기야 이 관계를 하루라도 빨리 끊겠다는 생각에 이혼을 결심했다. 그런데 이럴 경우 이혼 소송이 아닌 혼인 취소 소송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애초에 이 모씨는 김 모씨와 결혼하여 부부로 살려고 하기보다는 김 모씨를 영주권을 받는 도구로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혼은 이 모씨에 속아서 한 것이니 진짜 결혼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텍사스 주 이혼 법원에서 혼인을 취소하는 최종 판결을 받게 되면, 그 결혼은 무효화되며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위의 예에서 상황을 약간 바꿔 보자. 만약 이 모씨가 자신을 속여 사기로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도 김 모씨가 계속 이 모씨와 함께 살았다면? 비록 배신감에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혹시라도 이 모씨의 마음이 변해서 도리어 자신과 결혼 생활을 잘 이어갈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계속 결혼 생활을 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 혼인 취소 소송이 가능할까? 텍사스 주법에 의하면 어렵다. 물론 언제라도 이혼 소송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혼 소송과 혼인 취소 소송은 법적인 효력이 다르다. 이혼 소송은 결혼과 이혼이 모두 기록으로 남는 반면, 혼인 취소 소송은 법적으로 그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속아서 한 결혼을 무효화하는 것이 반드시 쉬운 일은 아니다. 속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있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속았다는 사실 관계가 해석의 차이에 따라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모씨가 실제로 김 모씨와 함께 부부로 사랑하며 살고 싶어서 결혼을 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물론 김 모씨를 통해 미국 영주권을 얻는 데 대해 한없이 기뻐했을 수 있다.
하지만 영주권만이 결혼의 유일한 이유가 아니었다면 어떨까? 물론 이 모씨에겐 예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훨씬 이전에 헤어졌고, 우연히도 김 모씨와의 결혼 후 어떤 기회로 다시 만나게 돼 바람을 피우게 된 상황이라면 어떨까? 이렇게 보면 인간사 참 요지경이다.

그런데 핵심은 그렇게 속이고 속은 사실 관계가 언제 있었는지 그 시점의 문제이다. 즉, 그러한 사실이 과연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있었는지 아니면 후에 있었는지 그것이 중요하다.
다시 위의 예로 돌아가 보자. 만약 이 모씨가 김 모씨와 결혼하기 이전에 이미 미국 영주권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여자 친구를 일단 숨겨 놓고 김 모씨와 결혼하려고 했다면 그건 혼인 취소 소송의 이유가 된다.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가 있다면 김 모씨가 혼인을 무효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씨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 모씨에게 커다란 성격차이를 느끼고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나게 된 옛 여자 친구와 바람을 피우게 되었다면 이건 또 얘기가 달라진다. 결혼 후 달라지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애초에 속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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