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가 지나간 자리

우리는 가끔 그저 쉽게 잘사네 못사네 하고 말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삶이 옛날의 임금보다도 편안하고 자유롭구나’고 할 때가 수월치 않게 있다. 치렁치렁 금은 장식으로 휘감고 머리 정수리까지 수술로 덮인 왕관을 쓰고 수십 명의 군졸들과 궁녀들을 거느려야 잠깐의 출입이 가능하던 제왕들의 일상은 얼마나 무겁고 번거로웠을까?
지금은 웬만한 사람들이면 안방에서 수십 개의 TV 채널을 돌리며 세계 정상의 운동경기나 온 세상 돌아가는 소식들을 앉아서 꿰뚫어 보는가 하면 근처에 근접도 못하던 영국 왕실을 내 집 안방에서 들여다보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뿐인가! 여름 겨울 분간 없는 과일들이 냉장고에 있어서 계절 구별 없이  맛볼 수 있으니 과연 옛 황제가 부럽지 않은 것이다.
한국 4.19 혁명 때 였다. 혁명이 일어난 며칠 후 이승만 대통령이 그 유명한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날 또다시 노한 군중들은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기붕의 집에 몰려가 집을 부수었다. 그 이튿날 여러 신문들이 그 이야기를 저마다 특기사로 보도했는데 군중들이 분노한 이유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그의 집 식당에 들어간 군중들이 냉장고 문을 열자 그곳에는 수박과 딸기가 있었더라는 것이었다.
군중들은 수박을 내어다 길바닥에 내던져 박살을 냈고 딸기그릇을 밟아 버렸다는 얘기였다. 지금 같으면야 그깟 수박이나 딸기가 그리 대수랴만은 아직도 보릿고개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추위를 견뎌야 하는 춘궁기였으니 그 수박이나 딸기가 화산 같은 분노를 치솟게 하는 호사였던 것일 게다. 어떻든 우리는 지금 한 나라의 국회의장의 냉장고 사정보다 훨씬 풍요로운 생활을 당연한 것처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뿐인가.
유대임금 솔로몬의 백향목 궁전보다도 더 잘 되어있는 난방장치나 에어컨을 마음대로 조절해가며, 컴퓨터를 이용하면 몇 달 걸려야 찾아낼 정보들을 아무리 서툴러도 한 시간 안에 찾아 인쇄까지 해 내는 시대에 살다보니 과연 조석 때 옆집 굴뚝에 연기가 나는지 안 나는지에 무심해 지기 십상이다. 옛날 제왕이나 국회의장의 호사에 비길 것인가! 자연히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호사에 대한 조명을 점검해 보게 된다.
한 이십여 일전 그 유명한 허리케인 샌디가 이곳을 지나갔다. 갑자기 누리고 살던 전기가 끊기더니 5일이나 깜깜했다. 이곳저곳에 커다란 나무들이 쓰러져 길을 막고 누워있어 전기가 불통이고 주유소에서는 정전으로 기름을 퍼 올릴 수 없어 기름을 팔지 못하니 자동차들이 움직이지 못하여 사람들이 왕래를 못하고. 불통. 모든 것이 전면 사통팔방 불통이었다. 휴대전화도 충전이 불가능하니 먹통일 뿐 모든 게 정지된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춥고 깜깜한 와중에서 한 가닥 보이는 것이 있었으니 당연한 듯 호사를 누리며 편안할 때 잃었던 ‘마음’,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이 ‘마음’들이 이웃의 문을 두드린다. 아침이면 이웃의 문을 두드리며 ‘밤새별일 없으셨죠?’ 평소에는 무심한 듯 지나던 이들이 밤새 어떻게 견디었는지를 문안하는 게 아닌가! 냉장고에 있던 무 몇 개를 들고 나가 ‘무생채는 한국식 샐러드예요. 날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무생채 만들어 놓으세요.’ 또 ‘뜨개질하면 추운걸 잊어버려요’라며 뜨개질 강습이 시작되어 온기 없는 방안이 조금씩 따뜻한 양지로 옮겨지곤 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지나온 얘기들로 추위의 긴장이 풀린다.
무엇인가가 넘치거나 턱없이 부족했던 삶을 통해서, 또 오래 꿈꾸었으나 가지 못했던 길들을 돌아보면서. 그러나 그것들을 통해서 절규하는 하갈의 눈을 밝혀 주셨던 하나님을(창21:19), 거역하는 발람의 눈을 밝혀 주셨던 하나님을(민22:31) 만나게 되었노라고. 깊은 밤 잠 속에서도 내려놓지 못했던  짐들을 다 내려놓고 사신다는 그 분들의 얼굴에 서려있는 감사!  감사!
‘삶을 잘 견뎌 내셨구나.’는 고마움에 그만 꼬옥 끌어안고 말았다. 어쩜 산다는 것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내일을 향해 가는 우리의 삶에 길을 내는, 징검다리를 놓는 작업인가 싶기도 하다. 샌디가 지나간 자리는 아직도 춥고 다 아물지 못하고 있지만 바쁘고 고단한 이들이 먼저 놓인 이 다리를 발견하고 잔잔한 위로를 얻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