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으로 얻는 축복

영적 세계에서 비운다는 것은 채우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익숙한 것들을 버리고 떠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결정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섭리)된 신령한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내 속에 옛사람이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 때, 비로소 진정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이 능력을 통해 죽은 영혼이 소생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 속에서 비움과 얻음을 경험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로 설명하시지 않으시고, 글로도 설명하시지 않으시고, 아브람을 택하셔서 25년 동안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아브람의 생애를 통해서 비움으로 얻는 약속과 축복을 보이십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 말씀은 아브람의 믿음에 작은 시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믿음을 심으시고, 비움으로 말미암아 축복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가? 하는 그 과정을 보게 됩니다. 사실 아브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찾아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갔다”(4절)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씨와 같은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씨를 뿌리면 그 씨는 땅에 떨어져 썩어 죽지만 새싹이 나오게 되는 것처럼, 말씀도 심음으로 믿음의 싹이 나오게 되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작은 시작이 되어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고,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실패와 실수가 있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경험했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 ‘비움’을 ‘떠남’으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났습니다. 이것은 그 땅을 떠났다는 의미 외에도, 믿음의 약속과 축복의 문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떠나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아브람에게 있어서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터전, 자신이 의지하는 삶의 줄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떠남은 아픔이며, 고통이며, 두려움인 것입니다. 오랫동안 익숙해 있고, 의지하며 살았던 터전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떠남(1절 비움)을 통해서 비움을 실천했던 복의 근원이(2-3절 채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가장 큰 비움은, 창22:1-13에 기록된 100세에 얻게 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제물로 드리라 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때부터인가, 그 가슴 중심에 독자 이삭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 실체였던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소망과, 관심과, 사랑이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난 이후로 하나님께 고정되었던 아브라함의 눈길이 이삭에게 고정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가슴에 가득 찬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품에 가득 차 있던 독자 이삭을 비워야 했던 것입니다.
창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이렇게 비움을 요청하신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여 행동하는 신앙이 될 때, 창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와 같이 비움은 축복이 되었습니다. 비움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심정)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천 년 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품에 있는 독생자를 비우셔서, 십자가에 희생시키셔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아브라함에게 경험시키셨던 것입니다.

‘비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탄은 예배 전문가였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법을 잘 알던 존재였다는 점입니다. 그 누구보다 예배의 기교나 종교 행위에 대해 뛰어난 전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자기 비움을 실천하신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고백적 기도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자기 ‘의‘가 강한 존재이며, 자신의 자아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예배할지라도 여전히 남을 판단하는 주체로 서있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더 가까운 쪽에 서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스스로 판단의 주체가 되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가 된 것입니다.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자 하는 선악과의 정신인 교만이 자신을 꽉 채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 어린 눈으로 이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기준으로 재단하게 되고, 판단하게 되므로, 영적으로 사탄과 묶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기 전에 비우는 일을 먼저 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유례없는 고난과 치욕을 당하심을 비하라 합니다. 이 비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감추시고 나타내지 않으심으로, 하나님으로 인정되고 경배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자기를 비우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하는 이처럼 사람으로서도 멸시를 받았으며(사53:3), 다시없는 수치요 굴욕이었지만, 이 굴욕의 상태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비우는 일은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새해를 출발하는 진정한 용기라 할 것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태복음4장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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