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포기

얼마 전 창조적 발상의 전환에 관한 단상의 글을 읽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회사 입사시험 중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당신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에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데, 거기에는 세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버스가 언제 올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추위와 비바람에 떨며 쓰러져가는 할머니,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는 의사,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그런데, 당신은 단 한 명만 차에 태울 수 있습니다. 누구를 태우겠습니까? 선택하시고 설명을 하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어떠한 답에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당신은 죽어가는 할머니를 태워 그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의사를 태워 은혜를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에게 보답하는 것은 나중에도 가능한데 비해, 이상형은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상형을 차에 태우고 가겠다는 솔직한 답변을 할 수도 있습니다.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최종적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 답은 이러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차 열쇠를 드리지요.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다드리도록… 그리고 나는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겠습니다.”
‘이상형을 위해서 차를 포기하겠느냐?’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누구든 차를 포기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차에 태워야 한다’라는 문장에 사고가 갇혀버리면 창조적인 대답의 가능성은 줄어들 것입니다. 차를 버릴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누구를 태울 것인가?’에 대한 답만 찾습니다. 이 점에서 위의 글은 발상의 전환에 대한 예로 볼 수 있습니다. 머릿속 전구가 반짝하는 듯한 유쾌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위의 글을 “창조적 발상의 전환”일 뿐만 아니라, “창조적 포기”로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응답자로 하여금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도록 한 기폭제는 바로 “가치에 대한 판단”과 이에 따른 과감한 “포기”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채용에 합격한 응시생은 미혼이었나 봅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남은 인생의 행복을 결정할 수도 있는 ‘이상형’에 대한 가치가 가장 높았습니다. 이 가치를 위해서 자신의 차를 포기함으로써 자비(할머니)와 보은(의사 선생님)에 대한 가치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상형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죠.
더 큰 가치를 위해서 보다 작은 가치를 포기할 줄 아는 것. 이것은 ‘용기’와 ‘통찰력’이라는 덕목이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용기는 보다 작은 가치의 것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해주며, 통찰력은 사물과 상황을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볼 뿐만 아니라 더 큰 가치의 것을 알아보도록 해줍니다.
미국이 720만 불을 주고 러시아로부터 한반도의 7배 크기의 동토(凍土), 알래스카를 산 것은 유명한 일례입니다.
1867년 미국 국무장관인 스워드가 이 거래를 성사시켰을 때, 여론과 미국의 언론들은 그를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피시, 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되면서 알래스카는 엄청난 석유와 금광 및 광물자원, 그리고 오염되지 않은 북극해 어종의 어마어마한 보고(寶庫)라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지금도 미국은 알래스카에서부터 캐나다를 관통하는 거대한 송유관을 건설해서 석유를 들여오고 있습니다.
비슷한 사례는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땅, 정치와 경제, 문화, 예술의 중심지인 뉴욕의 맨해튼 섬은 네덜란드 이주민들이 모포 몇 장, 담배, 그릇, 성냥, 그리고 24불을 주고 아메리카 인디언들로부터 샀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세운 영국인들은 원주민들에게서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를 소 세 마리와 바꿨다고 합니다.
창조적 포기는 재화(財貨)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은 명문대 휫튼대학에서 크리켓 선수이자, 최우수 졸업생이었으나 아마존 정글의 와오라니족 선교에 자신이 삶을 드려 순교한 청년, 짐 엘리엇의 고백입니다. 그는 생명과 영혼을 지고(至高)의 가치로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쌓아온 명성과 촉망되는 장래를 내려놓았습니다. 엘리엇 선교사는 와오아니족과의 첫 접촉에서 살해당했지만, 곧이어 고인의 뜻을 받든 가족들의 잇따른 헌신으로 결국 와오아니족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엘리엇 선교사를 죽인 와오라니족 청년은 회심하고 부족을 이끄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버리는 것 같지만, 잃는 것 같지만, 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창조적 포기의 혜안과 용기가 오늘 우리의 삶 속에도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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