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하지말라고?(2) 십일조가 한국교회에 뿌리내리게 된 과정

지난번 글에서는 십일조는 율법의 일부이니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중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왜 틀렸는지를 설명했다. 십일조는 율법으로 정형화되긴 했지만, 율법이 있기 이전, 아브라함 때부터 있어왔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하나였다.
신약성경에 십일조를 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은 없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일조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을 드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십일조에 대해 계속해서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많은 교회들이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가르치거나 복을 받기 위한 마중물로 말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십일조를 잘못 가르치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십일조가 가진 순기능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이러한 좋은 점 때문에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십일조 운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총신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인환 교수의 십일조에 관한 논문에는 이 사실들이 구체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성공적인 선교가 이루어진 나라였다.
여기에는 다른 나라와 구별된 선교 정책이 큰 역할을 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라고 하여 자립 전도, 자립 재정, 자립 행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선교사에 의존되어 있는 교회들의 경우 성도들은 언제나 선교사만 바라보고 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도 당연히 부족하다. 결국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교회가 무너진다.
그래서 한국 선교사들은 교회를 최대한 빨리 자립시키고자 했고 그 방법으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사용했다.
초기 한국교회는 한 달에 한 번 혹은 6개월에 한번 헌금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성도들이 주기적으로 헌금하지 않는 한 재정 자립은 불가능했다.
선교사들은 이를 깨닫고 한 1915년부터 정식 연보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일정한 금액을 교회에 헌금하도록 하는 권면이다. 그 정식 연보의 기준은 구약에서 참조를 해서 십 분의 일이 된 것이다. 그것이 한국에 시작된 십일조 운동의 시작이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성도들이 양육되고, 훈련되고 예배가 이루어진다면 그에 대한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이 운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짧은 선교의 시간 동안 한국교회는 재정적으로 자립하고 선교사에 의존된 교회 형태를 벗어나 한국적인 교회로 일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시대를 거치고 한반도 전쟁을 거치면서 이 운동은 수그러들고 대신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 신앙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요즈음 일어나고 있는 십일조 무용론은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축복을 해 준다는 기복 신앙에 대한 반발의 한 형태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욕물 버린다고 아이까지 버릴 순 없다. 십일조는 많은 순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회를 건강하게 자라게 하고 건강한 재정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자유롭게 선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나라는 1위가 미국이고 2위가 한국이다.
수많은 자선단체가 교회의 헌금으로 운영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미국은 매년 500억 달러(55조 6000억)가 십일조로 드려지고 그것이 복음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십일조 운동은 개인적으로도 신앙에 많은 이익이 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행위이다. 그것은 나의 재산, 소유, 인생의 목적이 모두 예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물질도 물론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니 모두가 다 목사, 선교사가 될 수 없다. 직업을 가져야 하고 가정을 꾸려나가야 한다.
더군다나 세상은 끊임없이 더 사라, 더 가지라고 충동질한다. 이런 세상에서 소유에 대한 욕망을 절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미국의 비영리단체 Agive의 도네이션 통계를 작성하는 사이트에서는 2만달러 이하의 소득자가 7만 5천달러 이상의 소득자보다 8배의 헌금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만약 십일조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성도들은 얼마나 헌신해야 할까? 초대교회처럼 재산을 팔아 드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1달러만 헌금해도 됩니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 너무나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다. 알아서 적당히 하세요는 너무 모호하다.
그런 관점에서 십일조는 헌금의 기본적인 기준을 가르쳐 준다. 사실 수입이 많은 사람에게 십일조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너무나 작은 분량 일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십일조는 크고 무거운 짐 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 헌신하는 물질의 기준이 제시됨으로 나만을 위하는 이기적이 삶에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된다.
결론적으로 십일조는 율법적인 명령이 아니다. 오히려 권면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십일조는 구원의 조건도 축복의 조건도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 헌신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기복 신앙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 전체를 드릴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수입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려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에 아름답게 전파될 수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헌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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