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물, 그리고 고인 물

아침에 지나가는 산책길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습니다. 작은 도랑 같은 물들이 모여서 만든 연못인데 가운데에는 인공으로 만든 펌프가 있어서 물을 고여만 있어서 섞지 않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매일 지나치다 보니 무더운 한여름과 비가 온 후의 연못을 관찰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참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때는 녹조 물이 온 연못을 덮어서 그 안에 사는 고기들이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한바탕 비가 내리고 나니 건강한 물로 재탄생이 되어 보기만 하여도 시원하였습니다.
작은 연못의 흐름에서도 느껴지듯이 우리의 삶에서의 고인 물 같은 순간은 무엇으로 빚어질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크게는 사회의 새로운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니, 적응을 안 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살지는 않는지, 작게는 내가 옳다는 소신으로 들리는 소리들을 듣지 않고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지 필자 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생활 자체가 단조로워진 요즘은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가 있어서 그 또한 인생의 여정에 한 번 즈음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단지 코비 드로 인해 강제 집행을 당해서 그렇지만 말입니다. 이 시대를 잘 넘어가려면 건강이 우선이라 더 건강한 음식을 준비하려고 노력하고, 가족이 더 많은 시간을 지내다 보니 자신을 더 내려놓은 법을 터득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현재 진행형인데 바뀌려는 마음이 없으면 현재 진행이 시작이 되지 못했겠지요.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현상을 보지 못하면 어느덧 고인 물처럼 상황이 악화되다가 소나기처럼 흠씬 내리치는 위기에서 정신을 못 차리다가 그로기 상태로 살아남던지 아니면 다행히 위기는 넘겼는데 남은 게 없을 수도 있는 게 우리의 인생길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가정, 재정, 인간관계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켜내야 하는 많은 삶의 요소들이, 맑은 시냇물처럼 주변을 살리지 못한 채 다 고인 물처럼 고여있지는 않은지 아니 썩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자기 점검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낳은 화가 Gustav Klimt(1862-1918)의 호수 그림입니다. 구스타프는 ‘키스’등 여성의 육체의 미로 에로틱한 작품 표현한 화가로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아르누보의 대표적 작가로서 사실적인 회화풍이 대세였던 당시의 보수적인 화단에서 1897년 빈 분리파를 결성하여 아르누보의 대표적 화가로 자리매김을 합니다.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서 순수회화와 모더니즘의 중간의 독보적인 화풍으로 위상을 확립했지만 어쩌면 고립된 듯한 느낌이 들때도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키스’를 보지 않았으면 비엔나를 떠나자 말라고 할 정도로 오스크리아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그와 그의 동료에게 의뢰했던 빈 대학의 대강당의 천장의 패널화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대학의 주요 학문이었던 ‘철학’ ‘의학’ ‘법학’의 주제를 다룬 패널화이었는데 화풍의 독특함보다 그의 가치관을 문제시하여 결국은 걸리지 못하였는데 지금 시기에 살펴보니 맞는 듯한 세월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철학은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로 묘사하였으며 의학은 인간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존재이며 법학은 정의보다는 고통과 무질서가 더 가까이 있다는 해석이었는데 지금의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우리가 이 답보다 나은 답을 할 수 있는지 반문을 하여 봅니다.
다른 견해와 생각에 대해 점점 더 옹졸해지는 사회, 나의 주장만 더 옮은 사회에서 더 이상 새로운 물을 흘러 들어올 수도, 담을 수도, 흘려보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물에 몸을 담고 있는 걸까요?
맑은 물, 고인 물, 흐르는 물?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우리인지요?

Lake Attersee by Gustave Klimt
Lake Attersee by Gust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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