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거리에 물든 단풍’ 출판을 자축하며

곱게 물든 단풍잎은 봄에 핀 꽃보다 더 아름답다

-초등학교 1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고 마을 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할아버지 몇 분이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햇볕이 내리쬐는 담벼락에 등을 기대어 무상무념의 표정으로 연기를 길게 내 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옆을 지나치면서 어린나이지만 참 쓸쓸해 보였다. “나이 들면 저렇게 지내지 말아야지…”

“Tomorrow is another day!”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뜬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명대사이다. 보릿고개를 넘는 일이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보다 더 벅차던 시절, 가난을 물리쳐야한다는 욕망은 늘 꿈틀대기에 낡고 쓸모없는 과거의 명함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싶었다.
인생에서 ‘늙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주름이 늘어나도 낙심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불로장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의미 있게 사느냐’일 게다. 나이라는 숫자, 그것에 굴복당하지 않는 것이 ‘청춘’이라지만, 아름다운 노후를 준비하려면 경제적 자립 못지않게 심리적인 면 또한 중요한 것이다. 정신만 살아있다면 노년이 되어도 청춘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열정을 쏟아내는 과정 아닐까? 세월이 흐르지만 여전히 활동하고, 이웃을 위해, 사회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사명은 없으리라. 40, 50대의 풍부한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나이 들어서도 나눌 수 있는 것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백발이 무성하다고 인생의 무기력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단풍이나 지는 해가 산천을 아름답게 물들이듯이, 인생의 노년도 한 폭의 수채와처럼 멋진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꽃이 예쁜 것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단풍의 아름다움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활짝 핀 꽃을 인생의 청년기라 한다면, 곱게 물든 단풍은 삶의 끝자락이라 할 수 있다. 꽃에서는 젊음이 물씬 풍겨나고, 단풍에서는 향긋한 노년의 깊이를 느낀다. 그래서일까? 꽃은 가까이 다가가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고, 단풍은 멀리서도 그윽하고 심오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단풍을 통하여 깨달은 바는,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해야 그 마지막이 아름답다는 것, 단풍은 자기의 할 일을 다 한 결정체이고, 여름날을 왕성하게 살았다는 증거이리라. 사람도 곱게 늙는다면 석양에 물든 하늘처럼 황혼이 아름다울 것이다.

아내는 가끔 두 아들에게 이런 말을 꺼낸다.
“너희들은 아빠만큼만 하고 살면 돼!”

40여년을 곁에서 지켜본 아내는 나에 대하여 ‘성실하고 어느 정도 성공한 인생’이라 여기는 것 같다. (사실 이 말은 나만의 착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아내에게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하겠느냐”고 물으면, “절대 아니올시다!”라는 대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물려받은 동전 한 푼 없이 시작한 신혼생활이었지만, 늘 계획을 세우고 알뜰살뜰 미래를 준비해온 자수성가의 본보기로 예를 드는 것 같다. 어느 아내가 남편을 가리켜 ‘성실한 사람, 성공한 인생’이라 하겠는가! 이것은 보통의 칭찬은 아닌 듯싶다. 자식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거북이처럼 느릴지라도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도전하라는 위대한 선언으로, 당당하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 아니겠는가! 아내의 이 한마디로 지난날 수고한 보상을 모두 돌려받는 듯하여 참으로 흐뭇하다.
언젠가 손자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할 날이 올 것이다. “할아버지, 저녁노을은 왜 아름다운 걸까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나 자연은 떠날 때의 인사가 가장 진실한 법이란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태양이 지면서 산과 들, 새들을 향해 잘 있으라는 진심어린 인사 때문 아닐까?”

이번에 뉴스코리아에서 나의 다섯번째 에세이집 ‘이민자의 거리에 물든 단풍’을 야심차게 출판한 것은,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라는 격려이기에 감사한 마음 한량없다.
내가 이승의 삶을 접는 날, 단풍처럼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고 떠날 수만 있다면, 이 보다 더한 축복은 없으리라…

오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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