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애의 행복을 나누는 수다

틀을 깨다

비행기 안은 조용하다.
창문 덮개가 모두 닫혀 있어서 밖이 환한지, 어두운지 가늠할 수가 없다. 몇 시쯤 되었는지, 몇 시간을 내리 잤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대부분 승객은 잠을 자거나 이어폰을 낀 채 영화를 보고 있다. 난 그저 이 기내에 흐르는 적막한 기류가 묘하게 편해서 묻어가는 중이다.
내 자리에만 비치도록 전등을 켜고 작은 랩탑을 켰다. 일순간 화면에서 밝은 빛이 쏟아진다. 열어주길 애타게 기다렸던 내 마음 같다. 블랙홀로 빠지는 게 아니라 메워지면서 뭔가 거꾸로 올라오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난 그 강한 불빛에 지고 말았다. 또 눈물을 들켜버렸다. 왜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나쁜 일이 따라오는 걸까. 참으로 야속하다.

아픈 와중에도 컴퓨터를 충전해 놓은 자신이 놀라웠다. 기고라는 책임이 무거웠나 보다. 졸고 있던 의식을 흔들어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게 만드는 힘이 있으니 말이다.
무의식 속에서도 지키려 애를 써왔을 것이다. 오랜 시간 썼는데 아무리 아파도 원고 펑크 낸 적은 없었다는 게 새삼 감사하다.

컴퓨터 시계가 나처럼 정신을 놓았는지 2017년 5월 14일 오전 8시 10분이라고 잘못 표시하였다. 고장 난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시간은 현실과 마주칠 일이 없을 만큼의 거리를 둔 채 쉬지 않고 제 길을 가고 있었다. 보폭을 좁히지도 넓히지도 않으며 말이다. 그렇게 해서 숨통이 트인다면 놔두고 싶다. 굳이 현실로 끌어내어 왜 너만 늦느냐고, 너를 위해 쏟은 돈이 얼만데 정신을 못 차리느냐고 닦달하고 싶지 않다. 살아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오래전에 방영했던 ‘나인, 아홉 번의 시간 여행’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모든 걸 잃었던 남자에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아홉 개의 향이 생긴다. 향이 켜 있는 동안 주인공 선우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돌아가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일들을 해결한다. 그 일을 할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은 가족이었다.
다 기억나진 않지만 선우가 친구에게 “2013년의 내가 1993년의 과거에 가서 죽었다. 그럼 그건 미래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내가 막기만 하면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하고 통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1993년이 아니라 그보다 먼 과거의 시간이 공존하는 곳이 있다면 기꺼이 향을 켜고 돌아가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무게를 측정할 수 없는 가족이란 마음의 짐을 덜고 싶었다.

나는 늘 과거형으로 글을 썼다. 일초 전 일을 일초 후에 기록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 상황은 과거이므로 반드시 과거형으로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아직도 과거로의 접근이 두렵다. 풀어야 할 숙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픔이 현재로 소환되는 것이 두려워 과거라는 틀에 가두고 파헤쳐 지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왜 과거로의 귀환이 이토록 두려운 걸까. 클릭하는 순간 어둠을 밝히는 스크린처럼 대명천지에 가슴이 뻥 뚫릴지도 모르는데, 나는 내 안에 웅크리고 우는 나를 안아주지 못하고 외면하거나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서 소설을 긁적이는지 모른다. 주인공을 만들고 그를 통해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었던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용기가 없어서 못했을 뿐이다.

오늘은 현재형으로 글을 쓰고 있다. 낯설다. 낯선 곳으로 가는 길은 용기가 필요하다. 책이 나올 때마다 지인이 “이번에도 네 이야기는 쓰지 못했구나”라고 했다.
그랬다. 그게 현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언제쯤에나 편히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보고 싶다, 궁금하다, 엄마니까.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았는데 한 번쯤은 생각이 가자는 대로 따라가도 괜찮은 거 아닐까.
아무 인사도 없이 죽으면 다음 세상에서도 맨정신에 살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살면 몇천만 년을 살겠다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오늘은 용기 내어 첫발을 떼어보았다. 지금은 휘청거리지만, 곧 걷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젠 편해지고 싶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